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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람의 열쇠와 프리메이슨 – 정리2

    이 책, 히람의 열쇠는 본질적으로 저자의 개인적인 연구와 견해를 바탕으로 한 책이며, 프리메이슨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정통 역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뒷받침하는 근거중 일부는 아직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았거나 반박된 상태이며, 검증하기 어려운 주장도 포함되어 있어, 저자의 견해에 편향된 결론이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대중에게 베일에 싸여 있던 분야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저자의 열정과 자부심이 글을 통해 느껴진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역사 해석과는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이 책이, 기독교와는 별다른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는 입장에서 더 현실적인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물론, 그럴듯한 주장이 반드시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 연구의 방향성에 대한 저자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지지를 보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있기에 본 포스트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또한, 프리메이슨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기독교를 이해하고 반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은 역설적이지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저자의 주장이 만약 명백한 사실에 근거했다면, 가톨릭교회는 큰 위협을 받았을 것이고, 이로 인해 시대를 역행하여 이단 박해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프리메이슨이 공식적으로는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관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사사로운 감정을 편파적으로 휘두르지 않을것이며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합니다.
    개인의 신념에 대한 존중과 선택의 권리를 인정하는 태도가 성인이 갖춰야 할 성숙한 접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제가 반감을 갖는다고 해서 타인에게 개인적인 신념을 강요하지도 않을것이고, 불이익을 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의 책임은 오로지 운명의 주체인 그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때로는 불합리하고 부정확하게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진리나 깨달음이 강요나 외부의 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선택과 추구를 통해 얻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이 있는 자가 빛을 보고, 귀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진리의 문을 두드리려는 의지와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진리에 대한 갈망과 탐구의 자세가 결국 그 사람을 진리로 이끌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길을 걸어나가는 사람만이 궁극적으로 그 진리의 문을 열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6장: 태초에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에덴동산**
    저자들은 유대교의 종교적 신념의 발전을 탐구하며, 언어가 문명의 기초 요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언어들이 공통의 뿌리를 공유하는 것처럼, 종교들 또한 공통의 기원을 가질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인간이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화와 신들을 함께 옮겼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종교 전통 간의 유사성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약 2,700년 전 솔로몬 왕 시대 훨씬 이후에 최초로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 알려진 바로는 그 이야기들 중 다수가 약 5,000년 전 수메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수메르는 현재의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문명의 요람으로 여겨집니다. 수메르인들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딜문(Dilmun)이라는 곳에서 왔다고 믿었으며, 딜문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페르시아만 서쪽 연안에 위치한 바레인과 동일시됩니다.그들은 기원전 4000년까지 지금의 티그리스강 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남부 이라크에서 번성을 이룬다.

    수메르 문명**
    수메르인들은 현대 수준에 버금가는 수확량을 이루는 등 고도화된 농업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바퀴의 발명, 금속 가공 및 유리 제조와 같은 다양한 기술적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복잡한 도시들을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를 창조하여 자신의 역사와 종교적 신념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수메르 땅에는 20개나 되는 도시들이 있었다. 그중 중요했던 우르, 키시, 에리두, 라가시와 니푸르 등은 정치적으로 자치권을 지니고 있어서 각각 왕과 제사장이 있었다. 수메르인들에게 그 땅은 신의 것으로 신의 창조적인 생명이 없으면 끝나버릴 곳이었다. 왕은 신보다 지위가 낮은 세속의 신으로서, 공동체의 생산성을 확보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각 도시의 중심에는 신의 집. 즉 사원이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제사장들은 재판이나 토지 관리, 과학 및 신학과 종교적 의식 등 공동체 생활의 모든 측면들을 통제했다.

    수메르 도시들은 도시의 신에게 헌정된 중앙 사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통치자인 왕은 공동체의 생산성을 책임지는 세속적 신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에두바(edubba)’라고 불리는 학교들은 문서 작성, 수학, 법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도시의 행정과 문화 생활에 기여했습니다.

    창세기의 기원**
    저자들은 창세기의 이야기들, 특히 에덴동산 이야기가 이전 수메르 신화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수메르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는 창세기보다 거의 천 년 앞서 존재했으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입니다.

    수메르 인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 또 있는데, 바로 신과 최초의 역사 기록들이다. 프리메이슨 단원인 우리는 특히 메이슨 민간전승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에녹에 관한 수메르 기록들과, 메이슨 아크 마리너스 등급 의식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대홍수에 관한 수메르 전설에 관심이 있었다.
    어원 연구가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가 수메르의 전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창세기>에 언급된 우르나 라르사, 하람과 같은 도시들은 실제로 수메르에 존재했었다.

    이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설화는 분명히 <창세기> 창조 신화의 근원이었으며, 뛰어난 수메르인들이 발명했던 모든 것들이 신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이 창조한 건물들에 관한 언급은 이스라엘의 신화에는 나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유목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은 <창세기>가 쓰일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들에 살았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을 몰아내고서 말이다. <창세기>의 신 야훼(여호와)는 이 설형문자 서판이 쓰인지 몇 백 년 뒤에서야 존재하기 시작했다.

    저자들은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기록된 메소포타미아 홍수 이야기가 성경의 노아 홍수 이야기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합니다.
    수메르인들은 자연의 힘을 의인화한 여러 신들을 믿었습니다. 폭풍의 신은 수메르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신은 노아 이야기에서 대홍수를 일으킨 신의 영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자들은 프리메이슨이 특히 이러한 고대 신화들, 특히 홍수와 관련된 신화들에 큰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 신화들이 ‘방주 선장(Ark Mariner)’ 의식에서 보존되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전문가들은 흔히 후대 문명들의 신들이 수메르의 다산과 폭풍의 신들이 발전한 것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폭풍의 신이 수메르와 노아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수메르인들은 자연을 살아있는 존재로 보았고 신들과 여신들은 그 살아있는 땅의 힘의 화신이었다. 즉 각각은 역할을 가지고 자연의 힘을 행사했다.

    날씨를 관장하는 폭풍의 신이 노아 이야기에 나오는 대홍수를 일으켰을것이며, 프리메이슨이었던 우리가 폭풍의 신과 홍수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프리메이슨의 아크 마리너(방주 선장) 등급 의식에는 노아 선장 이야기와 홍수 설화가 완벽하고 세세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메르인들이 극복해야 했던 하나의 중요 문제는 티스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남쪽 바다로 흘러 지나가는 낮은 평아에서 일어나는 홍수였다. 홍수는 주기적으로 일어났지만 언젠가는 드물게 큰 규모로 일어났음에 틀림없고, 그 결과 민간전승으로 길이 살아남게 된다. 노아로 불렸던 인물이 실제 방주를 만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대홍수가 실제로 일어난 것임은 확신할 수 있다.

    <창세기>, 특히 셋(아담의 셋째 아들)과 가인(아담의 장남)의 가계를 더 분석해보니 이 창조 이야기가 수메르에서 나왔음이 확실해진다. 라르사에서 나온 수메르 왕들의 목록에는 홍수 이전에 통치했던 10명의 왕 이름과 1만 년에서 6만 년에 이르는 그들의 통치기간이 나오며, 그 끝은 이렇다. ‘대홍수 후 왕권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이는 대홍수 이후에 새로운 시작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두 번째 라르사 목록의 마지막 이름은 지우순드라였는데, 이는 우타나피슈팀의 다른 이름으로, 길가메시 전설의 열한 번째 서판에 쓰인 바빌로니아 대홍수 서사시의 영웅이다. 이 목록에서 일곱 번재 왕으로 기록된 자는 신들과 관련된 문제들에서 특별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며 최초로 예언을 했다고 여겨지는 에녹이다. 성서는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 고 말하고 있으며, 유대 전통은 그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림을 받았다고 한다. <창세기>의 저자가 초기 유대 전통에 들어온 수메르 자료를 사용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렇듯 유대인들과 고대 수메르 지방의 종교 사이에는 분명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왜 원저자, 또는 야휘스트(Jehovist: 구약 성서 중, 신을 야훼라고 기록한 부분의 저자)가 대홍수 이전의 셋의 자손들을 그토록 오래 산 것으로 그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볼 때에 좀 더 복잡해진다. 신이 내린 대홍수 심판 전후의 삶 간에 극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하지만 다른이유도 있을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수메르 왕 목록에 기재된 천문학적 숫자들이 점성술의 산물로서 별들을 관찰해 나온 측량 결과를 신화적인 왕의 치세 기간 계산에 적용했다고 주장해 왔다. 같은 방식으로, 초기 유대 저자들은 창조 시점에서 솔로몬 성전 건설까지의 연수年數를 정한 연표와 맞추기 위해 목록의 숫자들을 정리하고, 이 기간을 시대별로 나누어 제일 첫 기간을 창조에서 대홍수 시대까지의 1천656년 기간으로 잡았을지도 모른다.


    수메르의 쇠퇴**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 문명이 쇠퇴함에 따라 사람들과 신들 간의 관계도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의 신, 즉 가정신이 더욱 중요해졌으며, 이러한 신들은 공동체 전체가 아닌 개인을 보호하는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개인들이 자신들의 신들과 더욱 개인적인 관계에 의지하게 된 것을 반영합니다.

    거대한 지구라트(옛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의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로 유명한 우르는 기원전 3000년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국가 중의 하나로 여겨졌다. 도시의 북쪽과 서쪽에는 주요 운하가 있어 유프라테스 강과 바다로부터 배들이 들어왔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선적표를 보면 금과 구리 광석, 경재, 상아, 진주 등의 보석들이 하나의 뱃짐에 실렸다고 한다.
    우르는 기원전 2100년경 우르-남무 왕 치하에서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린다. 이때 도시 대부분의 지역이 재건설, 개발되었고 인구는 5만 명이나 되었다. 거대한 지구라트는 그 규모가 커지면서 모자이크로 장식되었으며 관목들과 나무가 심긴다. 꼭대기에는 그 도시의 신인 달의 신 난나의 신전이 있었는데, 기원전 2000년에 그만 신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16개의 다른 수메르 도시들과 함께 우르가 엘람인들에게 약탈당할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을 저버렸고, 그 결과 신이 그들을 적으로부터 지켜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끔찍한 사건을 목격한 필경사가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모든 산책로에 죽은 자들의 주검이 뒹굴고 있었으며, 축연이 벌어지던 궁전들에는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신전들과 집들은 무너지고 귀중품은 약탈당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 대부분은 노예로 잡혀 갔다. 도시 우르는 살아남았지만 다시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으며, 기원전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소도시로 전락하고 만다. 이 쇠퇴기 동안 수메르인들과 모든 신들 간의 관계는 틀어져버려 개인적 신들의 개념이 부각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름이 없었던 이 인격적 신들은 개개인과 직접적으로 연결 되는, 우리가 흔히 수호천사라고 부르는 성질의 존재였다. 이때 개개인은 아버지로부터 신을 물려받아, 누군가 ‘ 조상신을 섬긴다’고 말할 때에는 일반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가족 정체성, 즉 그의 생득권을 가리키게 된다. 이 개인적 신은 복종과 숭배를 대가로 개인을 돌보아주고 필요하면 더 위대한 신에게 요구사항도 전해준다. 인간이 악한 행동을 하면 신은 그를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했던 것은 바로 인간이다. 따라서 만일 그가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는 자기 신의 반응을 두려워했으며, 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짓을저질렀어도 본인만 괜찮다면 그는 안전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쁜 행동을 통제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아브라함과 수메르**
    기원전 2000년에서 1800년 사이의 쇠퇴기 중, 아브람(Abram)이라는 인물이 우르(Ur) 도시를 떠나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섰습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인물의 여정은 역사적 인물과 이스라엘의 신이 될 신과의 첫 번째 만남을 의미합니다. 저자들은 아브라함의 신념이 수메르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그가 고향의 사상과 관습을 함께 가지고 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시대를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성서에서 실제 인간(신화적 인물이 아닌)과 유대인의 신이 된 신적 존재 간의 첫 만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구도 이제껏 수메르에 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사실 이 기간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고고학자 P. E. 보타가 지금은 메소포타미아로 알려진 지역에서 중요한 발견들을 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메르 문화는 5천 년도 더 전에 확산되기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북아프리카/남-서 아시아에 기원을 둔 이 문화의 발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예는 켈트족이다. 그들은 중부유럽 전역을 이동하여 결국 서부 스페인 해안지역과 브리타니, 콘월,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역에 정착했다. 또, 그들의 뒤엉켜 매듭지어진 문양들은 중동 예술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현대 켈트족의 DNA분석 결과는 그것이 북아프리카 종족들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수메르가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참조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메르에 관한것들은 모두 대홍수 이후의 일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이 대홍수로 이 땅에서 사라저버리기 전에는 휠씬 더 거대했을 것이다.


    고대의 대홍수 신화

    대홍수는 여러 고대 문명에서 중요한 신화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성서에서는 노아가 가족과 동물들과 함께 살아남았다고 기록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는 우타나피슈팀 왕이 엔릴 신(하늘, 바람, 폭풍우 등을 지배하고 인간의 운명도 다스리는 수메르의 신으로, 기원전 2300년경에는 셈족에 의해 받아들여져 벨(왕)이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으며, 바빌로니아의 제1왕조 무렵에는 마르둑에 의해 그 지위가 대체됨.)이 다른 신들을 겁주기 위해 일으킨 대홍수로부터 동물과 씨앗들을 구해낸다고 전해집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듀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가 제우스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방주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홍수의 고고학적 증거

    기원전 6000년경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대홍수의 증거가 우르 근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홍수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계곡 전역을 덮었으며, 깊이 2.5미터의 퇴적 점토층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퇴적층은 거대한 홍수가 발생했음을 시사하며, 이로 인해 수메르 지역의 인간 문명이 거의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홍수는 수메르 문명이 고고학적으로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대홍수 후, 생존한 수메르인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했으며, 건축 및 과학에 대한 지식을 지닌 생존자들이 이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직면했던 주요 문제는 ‘왕실의 비밀을 지닌 자들’ 이었던 생존자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라진 신전의 대제사장들로, 따라서 과학, 특히 건축 과학의 힘을 지녔었을 것이다. 일부는 살아남았음에 틀림없다. 자연과 과학의 감추어진 신비들에 관한 지식을 지녔던 그들은 대홍수가 올 것을 충분히 알고 높은 곳으로 가거나, 실제로 방주를 지을 시간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건물의 비밀과 상징은 대홍수보다 앞서 존재했지만, ‘전체 세계’를 재건설해야 할 갑작스럽고 급박한 필요로 인해 직각으로 이루어진 수평, 수직의 새 질서에 기반을 둔 새로운 조망이 생겼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이 프리메이슨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메이슨의 과학과 부활 개념 사이에 연관성을 불러일으켜 준다. 세계 자체가 ‘죽음’ 을 겪고 다시 한 번 창조의 바다에서 일으켜 세워 졌으니 말이다.

    수메르 문명의 영향

    수메르 문명은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지역의 문화와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북아시아의 타타르족, 몽골족, 부랴트족, 칼미크족은 7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거룩한 산에 대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수메르의 지구라트(계단식 신전) 개념과 일치합니다. 이들은 북아시아 유목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개념이지만, 그들이 이 신성한 탑에 ‘수메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서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탑과 유대교

    수메르 신전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벨탑입니다. 이 탑은 노아의 후손들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나보폴라사르 왕이 바빌론에 지은 이 탑은 높이가 약 90미터나 되고 꼭대기에 마르둑 신의 사당이 있는 7층의 지구라트였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창세기에 기록된 대홍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고대 전설들의 혼합물로서, 사람들의 언어가 어떻게 분화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설명은 유대인들에게 왜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이해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유대교의 신이 수메르 종교의 변형 중 하나임을 시사하며, 수메르 종교가 이후의 많은 위대한 종교들의 근원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10장은 어떻게 노아의 아들들이 세계 도처에 새로운 종족을 일으켰는지 설명하면서 대홍수 이후의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이 아들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셈족의 근원인(600년 동안이나 산) 셈으로, 셈족에는 당연히 유대 민족도 포함된다. 다음 장은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 오로지 하나의 언어만이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온 땅에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만 있더라. 그들이 동쪽으로부터 여행을 하여 시날 땅에서 평원을 만나니 거기에서 거하였더라.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가서 벽돌을 만들어 단단하게 굽자.” 하고 그들은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회반죽을 대신하였으며 또 그들이 말하기를 “가서 우리를 위하여 도성과 탑을 세우되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자. 그리하여 우리가 온 지면에 멀리 흩어지지 않게 하자.” 하더라. 주께서는 인간의 자손들이 세우는 도성과 탑을 보시려고 내려오셨더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백성이 하나요 그들 모두가 한 언어를 가졌기에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하기로 구상한 일은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가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그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주께서 그들을 그곳에서 온 지면에다 멀리 흩으시니, 그들이 도성을 짓는 것을 그쳤더라.’

    이 교묘하고 합리적인 설명은 유대인들에게 왜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실히 해주었다. 또, 하나님이 노아의 혈통을 통해 다시 번성하게 하시기로 하기 전 세상은 공허한 황무지였기에, 이전에 거기 살던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셈의 아들들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을 약속했다는 사실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 되었다. ‘신’은 수메르를 시작으로 여러 길을 택해 나일 강과 인더스 강 계곡, 그리고 어쩌면 황하에까지 이르러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의 근원이 된다. 이 모든 것은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들이며, 수메르 종교의 최근 변형들 중의 하나가 바로 유대인의 신인 것이다.

    이 글은 아브라함과 유대교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신화적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만, 이 글에서는 그가 역사적 인물로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그의 여정과 종교적 배경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원과 여정

    • 우르에서의 출발: 아브라함은 고대 수메르 문명의 도시 우르에서 출발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하란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가나안(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향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신인 야훼와 계속해서 교류하며, 가나안 땅이 그의 후손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 유목민적 삶: 아브라함과 그의 추종자들은 정착지가 없었기 때문에 유목민으로 묘사됩니다. 당시 사회적, 정치적 불만이 종교적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아브라함이 이끈 그룹은 하나의 특정한 신앙 체계를 중심으로 뭉친 셈족 유목민 집단이었습니다.
    • 신앙과 신: 아브라함의 신앙은 특정한 개인 신(아마도 수메르에서의 전통 신앙에서 비롯된)과의 관계로 설명됩니다. 이 신은 후에 야훼로 발전하며, 유대교의 신이 됩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다양한 신앙이 공존했고, 유대교의 단일신 신앙이 자리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기로 결정한 뒤, 하나님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나는 길은 당연히 두 강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조상들이 ‘다른 신들을 섬긴’ (<여호수아> 24:2)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야훼, 즉 유대인(결국에는 기독교인들)의 신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었다. 윌리엄 캑스턴(영국 최초의 인쇄업자)에게 퍼스널 컴퓨터가 그랬듯이! 야훼가 그의 ‘선민’에게 자신을 알린 뒤에조차도 그에 대한 신앙은 거의 천 년 동안 기껏해야 단편적이었으며, 다른 신들 또한 그만큼 대중적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유산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되돌아보며 오래된 구전을 ‘그래야만 했던’ 필연성에 끼워 맞추게 된다.

    아브라함은 북쪽에서 내려와서는 매일의 일상을 차지해버린, ‘신앙 없는’ 유목민들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고향 우르를 떠나고자 했을 것으로, 그 당시에는 정치적인 불만이 언제나 종교적 불만으로 표현 되었을 것이다. 성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율법이 거부당한 인간의 규칙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이 땅에서의 신의 대리자가 좌천 당했음을 시사한다. 즉 우르의 왕과 제사장들 말이다.

    아브라함은 흔히 성서에 기록된 최초의 역사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 노아는 지구상의 생명의 시작에 대한 초기 히브리의 믿음과 전통을 구현하는 시대 및 사람들의 전형이다. 아브라함이 유목민인 양 행세하며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 수메르에서부터 동행한 자신의 개인적인 신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실 아브라함과 함께 움직였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땅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아브라함을 유목민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히브리Hebrew라는 명칭이 이집트인들이 베두인족처럼 유랑했던 셈족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데에 사용했던 용어 ‘하비루Habiru’ 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유대 역사는 유대인 자신들이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셈 자신은 수메르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자 나중에는 ‘약속된 땅’ 을 찾으러 수메르를 떠난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인물이다. 이 수메르 거주자들에 대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는 수메르 인들이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대 국가를 이룬 자들이 틀림없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민족이나 심지어는 역사상의 국가조차도 아니었다는 것을 모든 증거는 보여주고 있다. 나라 없는 공통점을 갖고 수메르 하위집단에 기초한 종교를 차용했던 셈족 집단들의 혼합체였던 것. 아마도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의 이스라엘인 10명 중 한 명은 수메르 혈통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아주 적은 수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볼 때에,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 하반기 동안 가나안과 이집트로 간 유일한 수메르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상한 옷을 입은 아시아인들로 턱수염을 기르고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하비루는 이집트에 살던 유목민들과는 구별되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희생

    • 구약성서의 해석:**
      – 글은 구약성서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볼 때의 문제점과 모순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 땅에 대한 유대인의 정복은 단순한 신의 선물이 아니라, 침략과 약탈로 묘사됩니다.
    • 이삭의 희생:**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아들 이삭을 희생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희생을 면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며, 후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도 비견됩니다.
    • 가나안 정복:**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가나안의 원주민들은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음을 최근의 고고학 연구가 밝혀냈습니다. 성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신앙은 폭력적이고 정복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제시됩니다.

    자신의 신으로부터 가나안이라는, ‘비옥한 초승달’ 북쪽 부분으로 오늘날 여겨지는 땅을 그의 민족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세운 핵심인물로 여겨진다. 앞에 개괄된 수메르 신들의 특성으로 볼 때에, 아브라함은 친구이자 수호천사인 특정 신을 모신 제사장이었을 것 같다. 구약성서를 읽는 일반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은 가나안 땅이 신이 그의 선민들에게 주는 정당한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지만, 이 약속된 땅을 취하는 것은 사실 노략질과 다름없었다. 만일 구약성서의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유대인들과 그들의 신은 악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어떤 초자연적인 정당화도 구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그 많은원주민 학살을 변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애당초 히브리인들의 신이었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흐릿하고 모호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그의 선민에게 가나안이라고 불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일종의 수메르나 재발견된 에덴동산)을 주기로 약속했다고 여긴다. 하지만 가나안은 고귀한 유랑민들이 새로운 삶의 터를 개척할 수 있는 주인없는 황무지가 아니었으며, 야훼는 결코 마음 착한 독지가가 아니었다.
    최근의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가나안인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과 수없이 많은 작은 도시들, 마을들 그리고 식량 생산과 제조 및 세계적인 정교한 무역 체계를 갖춘 선진 문명인이었음이 드러난다. 만일 성서에 나온 이야기들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당시 히브리인들의 신은 실제로는 칭기즈칸처럼 침략과 도적질, 학살을 정당화하는 두목이었던 셈이다!

    하나님을 한 치의 동정심도 없는 자만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미치광이로 그리고 있는 구약성서를 진짜 역사적 사실들의 기록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착민들의 도시들에서 수 많은 남자, 여자, 어린아이들을 학살할 것을 명령한 것 외에도 그는, 분명한 이유도 없이 자신의 친구들을 공격한 것으로 알려진다. <출애굽기> 4:24-25에 보면, 야훼는 모세에게 이집트로 가서 ‘노예로 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하라고 한 바로 직후 모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모세를 자신의 신랑이라고 주장했던 한 여인이 야훼의 이 괴팍한 일면을 폭로했는데, 이것은 비난의 화살을 야훼의 본질과 ‘대립되는’ 마스테마라는 영에게 돌리기 위해 후에 성서 외전인 희년서Jubilees에 다시 쓰인다. 하지만 <출애굽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모세의 아들을 죽인 것이 확실하다. 지금까지는 아무도 아브라함의 여정에 확실한 연대를 부여한 적이 없지만, 그가 기원전 1900년 이후에서 기원전 1600년 이전 사이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만일 이 기간의 끝부분에 존재했다면, 기원전 1786년에서 기원전 1567년경까지 200년 넘게 이집트인들을 침략하고 억압했던 소위 ‘힉소스 왕조’나 ‘양치기 왕들’ 의 이집트 치하에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만일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점령했던 셈족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경우, 역사는 이치에 닿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추종자들과 함께 발릭 강 기슭에 있는, 오늘날 시리아의 주요 도시인 하란으로 떠났는데, 이 강은 수메르에서 위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교역 통로였다. 거기에서부터 그는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데리고 간다.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여행 도중 자신의 개인 신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느낀 아브라함은 자신이 뭔가 잘못을 했다는 걱정에 휩싸인다. 아마 이는 무리 속에서 벌어진 나쁜 문제나 사고로 난처해진 –그가 그것을 신이 보호해주지 않은 결과로 해석하며 합리화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진노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길밖에 없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한다. <미가서> 6:7이 그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아브라함 이야기에는 ‘이 일들 후에’ 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래야 했던 중요한 위기의 순간들을 말한다. 위의 경우가 그중 하나다. 어린 이삭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문제가 해결되어, 극도로 미신적인 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마음을 바꾸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삭이 아브라함 손에 희생된 뒤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휠씬 후에 나온다. 여기에서 이삭은 사람들에게 구원과 속죄함을 가져다주는 ‘고통받는 종’으로 그려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약 1천300년에서 1천 년 사이의 긴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다가 기록되기 시작한 부족의 전설이었다. 비록 야훼는 모세 시대나 되어야 도입되지만, 쓰일 당시 아브라함의 신이 야훼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였다. ‘조상의 신’ 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하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나올 때에 모세가 사용한 용어들은 바로 아브라함 자손의 개인 신을 가리키는 독특한 수메르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랑하던 아시아인들(원시 유대인들) 중 적은 수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겠지만, 그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전설로 여기며 현재 처지를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숭고한 이유로 생각했다.
    만일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 노예들 앞에 서서 자신이 모든 신을 능가하는 신 야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했다면, 그는 미쳤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유대인의 기원과 아브라함의 역할

    • 유대 민족의 기원:** 유대 민족은 특정한 민족 집단보다는 다양한 셈족 집단이 혼합된 결과로 설명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유대 민족의 기원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민족적 요소가 결합된 복합적인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수메르 문화와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 종교적 유산:** 아브라함의 신앙은 단지 그의 개인 신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결국 유일신 신앙의 기초로 발전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기록되면서 현재의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신의 발달 초기 과정을 살펴보고 나서야 우리는 우리가 받은 초기 역사에 대한 교육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전혀 알지 못했던 수메르 지방은 문명의 발상지이자 최초로 기록과 교육이 이루어졌던 곳이었다. 또, 수메르인들은 기둥과 피라미드의 창시자로서 자신들의 땅 너머 멀리까지 이를 전파했다. 한편,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시로 알려진 수메르 창조 신화보다 거의 천 년이나 뒤져 있음이 밝혀졌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과 1600년 사이에 ‘조상들의 신’ 으로 알려진 자신의 개인 신과 함께 수메르의 도시 우르를 떠났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기원전 1786년에서 1567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던 힉소스 왕조와 관련이 있거나 겹치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이 질문에 답할 만큼 이집트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않았다. 아울러 프리메이슨의 특성 몇몇이 희미하게 보일듯 말 듯했지만, 현대 프리메이슨단과의 다른 어떠한 관련도 전혀 찾지 못했다. 우리의 퍼즐을 완성하려면, 역사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 문명을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제7장: 이집트인의 유산

    이집트의 기원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았다는 일반적인 믿음은 근거가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피라미드가 세워질 당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기 이집트인들이 수메르 도시 건설자들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분명히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홍수 이후, 비밀스러운 건축 지식을 가진 일부 사람들이 북쪽과 서쪽으로 이동하여 나일 강의 주기적인 홍수를 조절함으로써 황량한 사막을 비옥한 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들을 만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일 강은 이집트인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비가 농작물을 키우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일강은 이집트 자체와 동의어가 된 것입니다.
    **이집트 문명의 발전**
    수만 년 동안 나일강은 소규모의 고립된 유목민 그룹들을 지원했습니다. 기원전 4000년경에는 정착 농업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영토를 방어하고 보호할 원시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이들 공동체는 협력이 갈등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3100년 이전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통일되어 하나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 형성된 왕국의 종교는 여전히 분열된 상태로, 각 도시는 원래의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들이 한때 인간처럼 살았고, 두려움과 희망,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인간처럼 죽음을 맞이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전능하고 불멸의 신이라는 개념과 모순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궁금해집니다. 5,500년 전 나일강을 통제했던 외부인들이 현지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마법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대에는 마법과 종교가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인물들은 쉽게 신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선사 시대의 사건을 깊이 탐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이들 ‘살아있는 신들’이 떠나거나 하나의 민족으로서 사라지기 전에 피라미드 건설자들에게 건축 비밀을 전수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집트인의 신앙

    혼돈과 질서의 개념**
    이집트인들은 물질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개념은 비논리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세계가 혼돈에서 질서가 나타나면서 시작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이 질서는 인간, 하늘, 땅이 존재하기 전, 신의 시대보다도 이전에 존재했던 신이 창조한 것이었습니다. 이 혼돈 상태는 “눈(Nun)”이라고 불렸으며, 이는 수메르와 성경의 텍스트에서 어둡고 물이 가득한 혼돈 속에서 창조의 힘을 가진 신이 질서를 명령한 것과 유사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은 혼돈 속에 얽혀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나타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의 물질 세계에 대한 이해는 현대 물리학에 기반한 우리의 세계관과 놀랍도록 비슷했습니다.
    **도시별 종교적 차이**
    초기 종교는 멤피스, 헤르모폴리스, 크로코딜로폴리스, 덴데라, 에스나, 에드푸, 그리고 태양의 도시로 알려진 헬리오폴리스(이전에는 *온*으로 알려짐) 등의 주요 도시들 사이에서 약간씩 달랐습니다.
    이들 도시의 신앙의 핵심은 역사에서 처음으로 작은 섬이나 언덕이 혼돈의 물에서 나타나 생명을 위한 비옥한 장소를 만들었던 순간에 있었습니다. 헬리오폴리스와 헤르모폴리스에서는 질서와 생명을 가져온 신이 태양신 *레*(Ra)였으며, 멤피스의 위대한 도시에서는 대지의 신 *프타*(Ptah)였습니다. 이 신들은 처음으로 물에서 섬을 창조한 순간에 자아를 인식하게 되었고, 레/프타는 물질적 풍요, 예술적 영감, 그리고 생존에 필수적인 기술, 특히 건축에서의 영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신성한 왕으로서의 파라오 개념**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처음에는 왕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파라오로 알려졌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통치 권력을 가진 인간일 뿐만 아니라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모든 왕은 신의 아들로 간주되었으며, 죽은 후에는 그의 신성한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무한한 하늘에서 영원히 존재할 운명이었습니다. 오시리스의 이야기는 이러한 신들과 그들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시리스 신화**
    하늘의 여신 누트(Nut)는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그 중 첫째가 오시리스였습니다. 이집트의 관습이 발전하면서 그의 여동생 이시스가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믿음직한 신 토트의 도움으로 오시리스는 지혜롭게 통치하였고, 사람들은 번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형제 셋(Set)의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셋은 오시리스를 죽이고 그의 시신을 나일 강 곳곳에 흩어 놓았습니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에 특히 상심하며 그의 시신을 찾아 조립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시신을 재조립하여 잠시 그를 되살렸고, 그녀는 그들과 함께 아들 호루스를 임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시리스는 별과 하나가 되어 죽은 자의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호루스는 자라서 셋과 싸워 그를 물리치고 이집트의 첫 왕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왕은 항상 신 호루스로 여겨졌고, 죽음 후에는 왕이 오시리스가 되고 그의 아들이 새로운 호루스가 되었습니다.


    두 땅의 통합

    약 5,200년 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당시 신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직면했던 구체적인 문제들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합이 두 나라의 안정에 필수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메르인들의 계단식 지구라트처럼 피라미드 건설은 왕과 사제들이 신들과 연결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피라미드 이전에,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기둥들이 있었습니다.
    **기둥의 상징성**
    통일 이전에 각 국가는 왕과 제사장들이 신들과 연결되는 중요한 기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기둥은 하늘과 땅 사이의 영적 탯줄이었습니다.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하나의 왕국 내 두 왕조가 되었을 때, 이집트인들은 두 나라와 한 하늘 사이의 삼중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신학 체계가 필요했습니다. 성경에서 *온)*으로, 그리스인들에게는 *헬리오폴리스*로 알려진 고대 도시 *아누(Anu)*에는 도시 자체보다 먼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성스러운 기둥 *아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이집트의 큰 기둥이었다고 믿으며, 상이집트의 기둥은 *네크헵(Nekheb)* 도시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와세트(Waset)*(후에 테베Thebes로 알려짐)라는 도시는 “남쪽 기둥”을 의미하는 *이우누 쉐마(Iunu Shema)*로 불렸습니다.

    후기 이집트 종교와 의식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이 성스러운 기둥들이 두 땅의 결합을 상징하며 그들을 하늘과 연결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남북의 두 나라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된 것은 하늘의 신 *누트*의 신성한 기둥에 의해 상징적으로 연결된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관문을 형성했습니다. 이 관문은 두 남북 기둥으로 이루어져 자연스럽게 동쪽을 향해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관문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안정성을 상징했습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타우이*(Taui/Tawy)는 두 개의 기둥이 동쪽을 가리키고, 떠오르는 태양의 방향을 나타내는 점들이 있는 모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동쪽에서 보면,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오른쪽 기둥은 메이슨(Masonic) 전통의 오른쪽 기둥인 *야킨*(Jachin)에 해당하며, 이는 “설립”을 의미합니다. 현대 메이슨 의식에서는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상이집트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세계가 *눈*이라는 원시 혼돈에서 처음 나타난 곳이기 때문에 *야킨*은 세계의 설립을 의미합니다.

    왼쪽 기둥은 하늘과 상이집트 사이의 연결을 나타내며, 메이슨 의식에서는 *보아즈*(Boaz)라고 불리며, 이는 “힘”을 상징합니다. 다음 장에서 탐구할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강력한 적에게 잠시 패배한 후 상이집트가 큰 힘을 발휘한 때를 가리킵니다. 프리메이슨은 두 기둥의 결합이 안정성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이는 이집트인들도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두 기둥이 안전하게 유지되는 한 두 땅의 왕국은 번영할 것입니다. 우리는 힘을 통해 두 기둥을 통합하는 주제가 이집트 역사에서 이 개념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유대교를 포함한 여러 문화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채택되었다고 믿습니다.

    Ma’at의 개념

    이집트 문명을 연구하면서, 저자들은 이집트인들의 삶에 중심이 되었던 개념, **Ma’at**을 발견했습니다. Ma’at은 우주의 균형을 상징하며, 진리, 정의, 질서를 대표했습니다. 파라오들은 Ma’at의 수호자이자 집행자로 여겨졌으며, 왕국이 신성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보장했습니다. 저자들은 마아트와 프리메이슨의 형제애, 자선, 진리라는 이상 사이에 유사점을 제시합니다. 마아트가 종교적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적, 우주적 질서의 근본 원리였던 것처럼, 프리메이슨은 종교 체계가 아닌 도덕적 조직으로서 이와 유사한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저자들은 현대 프리메이슨이 이 고대 개념들의 먼 후손일 뿐일지라도, Ma’at과 프리메이슨 사이의 유사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현대 사회가 평등과 안정을 이룰 수 있으려면 Ma’at에 내포된 원칙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Ma’at과 프리메이슨이 도덕적 원칙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과 균형의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합니다.

    이 둘은 문명의 존속과 사회적 진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의 실질적인 깨달음이다. 둘 모두 한 예로서 신전의 설계와 건물을 사용할 뿐 아니라, 인간의 행위는 공정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사실은, 확실히 우연의 일치 그 이상이다. 종교적 체계 밖에 존재하는 어떠한 사회에서건 도덕적 규범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따라서 마트와 메이슨주의가 현대 세계를 가르칠 수 있는 조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마트의 힘과 아름다움을 깨달아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요즘의 프리메이슨은 서투른 한 후예라는 것을 점점 더 통감했다. 후예가 맞기는 하다면 말이다. 아마 그랜드 로지의 단원이라면 프리메이슨의 공공연한 가치에 따라 살 것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상, 사회적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평범한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드물다. 현대 서구세계에서 연민이나 자선과 같은 인간의 가치는 기독교적 가치 와 혼동되고 있는데, 이는 큰 잘못이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친절하고 베푸는 삶을 산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어떠한 종교적 요구사항이기보디는 그들의 개인적인 영성과 더 관련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마트의 현대적인 형태에 관해 살펴보는 동안,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인간의 선함과 평등을 찾는 무신론자들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데에 생각이 미쳤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틀렸다. 종교처럼 그들의 신조는 그들의 미덕’ 을 위한 예정된 방법론에 충실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 마트는 순수한 미덕으로서 자유로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서구 사회가 평등과 안정이리는 그 광범위한 목적을 이룬다면 그것은 마침내 마트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리라. 현대의 기술자들이 피라미드 건축자들의 그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기술에 놀라듯, 우리의 사회 과학자들 또한 이와 같은 개념에 놀라 마땅하다.
    이렇게 하여, 메이슨주의와 마트 개념 간의 관련은 부정하기 힘든 것으로 드러났다. 혹자는 분명히 메이슨주의가 마트 개념을 본뜬 기발한 17세기의 창안물이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의 그랜드 로지가 설립된 지 100년 후 로제타석(일부 상형문자를 그리스어로 번역한)이 해독되고 나서야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이해될 수 있었기에 그 주장은 말이 되지 않았다. 즉 그전에는 프리메이슨이 마트에 관해 알고 모방할 수 있었던 길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우리가 프리메이슨 의식으로부터 배웠던 원리들을 전했을 뿐 아니라. 2개의 기둥 개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한 문명을 발건했다. 게다가 오시리스와 관련된 살인과 부활의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솔로몬 성전, 또는 다른 어떤 성전의 건축자와는 무관했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 이집트 문명을 한층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를느꼈다.
    이집트인들은 형성기 동안 이기주의의 한계들을 경험하고. 마트’ 라는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을 통해 인간과 신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 이집트인들의 미래지향적 기질은 이 관용과 우애의 정신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고대에 마트는 법체계의 기초가 되었으며 곧 우주와 모든 천체의 평형으로부터 일상의 정직과 공정한 관계에 이르는 모든 정의’ 를 상징하게 되었다. 정신과 자연을 같은 실체의 양변으로 이해했던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는 균형 잡히고 조화된 것이라면 둘 중어느 것이든 마트의 현시로 여겨졌다.

    우리는 메이슨 연구를 통해 모든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것에 대한 이해는 프리메이슨주의의 중심이며, 자연과 과학의 숨겨진 신비를 연구찰 권리가 제2등급 프리메이슨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세트와 오시리스의 이야기는, 합법적인 왕의 신성한 명령은 세트로 표현되는 혼란과 무질서조차도 깰 수 없는 것임을 이집트인들에게 보여주었다. 마트의 개념은 훌륭한 왕의 특성이 되었고, 고대의 기록들은 모든 왕과 파라오들을 ‘마트의 본분을 행하는 자’ 나 마트의 보호자 , 또는 마트를 통해 사는 자’ 로 묘사하고 있다. 사회 질서와 정의의 균형은 마트’ 라는 수원, 즉 살아 있는 신 호루스인 국왕으로부터 폭포가 되어 떨어졌다. 오로지 국왕의 신성한 혈통 보존을 통해서만이 이집트 문명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분리할 수 없는 이 마트와 왕실 혈통의 개념은 반란을 억제하고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한 뛰어난 장치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나라는 정치적 안정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번영 또한 마트에 의존했다. 만일 백성들이 마트에 따라 삶을 살면, 신들은 필요한 양의 곡식을 위 해 적당한 나일 강의 범람을 보장할 것이었다. 너무 적거나 많이 범람한다면 그것은 백성과 왕의 잘못이었다. 또. 마트에 따라 살면 전쟁에서의 승리도 보장되었는데. 마트의 선한 백성들을 지원하는 신이 혼돈의 힘으로 여겨지던 적들을 쳐부술 것이니 말이다. 종국에 마트는 여신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녀는 태양신 레의 딸로서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하늘을 항해했으며, 종종 뱃머리에 서서 정확히 옳은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 마트는 머리장식에 타조 깃털을 꽃고, 각 팔에 앙크 십자(위에 고리가 달린 T자형의. 생명을 상징하는 십자)’를 매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또 하나의 발견은 마트의 형제가 달의 신 토트라는 사실로, 그는 레의 뱃머리에 마트와 나란히 서 있다. 우리의 관심은 토트가 초기 메이슨 전설에서 중요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를 찾은 뒤 일어나게 된다. 이집트인들에게 건축술과 종교를 가르쳐주고, 무엇이 옳은지를 정한다는 바로 그 토트. 악에 대항해 싸웠던 왕은 선한신 토트의 후계자’ 로 일컬어졌다.

    이집트 문명의 유산

    건축 성과**

    고대 이집트의 건축적 성과는 전설적입니다. 특히 기자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공학적 솜씨와 영적 신념을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구조물들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파라오의 불멸과 신들과의 합일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피라미드 건축의 정밀성과 규모는 수학, 천문학, 기하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며, 피라미드의 천체와의 정렬 및 건축 방법은 현대 학자들이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려고 애쓰는 정교한 지식을 드러냅니다.

    피라미드의 건설은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기능과도 얽혀 있었습니다. 각 피라미드는 사원, 도로, 귀족들을 위한 작은 무덤을 포함하는 더 큰 복합체의 일부였으며, 이들은 함께 신성한 경관을 구성했습니다. 전체 배치는 파라오의 사후 세계 여행을 용이하게 하고 신성과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을 촉진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피라미드 텍스트**

    이집트 신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 텍스트입니다. 이 텍스트들은 고왕국 시대의 피라미드 무덤에 새겨진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저작물 중 일부로, 고대 이집트의 종교적 관습, 우주론, 의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텍스트들은 파라오의 영혼의 여행, 신들과의 상호 작용, 그리고 영원한 존재로 변환되는 데 필요한 주문들을 설명합니다. 이 텍스트들은 파라오의 안전한 사후 세계 통과와 신들 사이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의식과 마법의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이집트 사상의 유산**

    이집트의 지적 유산은 국경을 넘어 이웃 문명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집트 문화를 무역과 정복을 통해 접한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수학, 천문학, 의학 지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와 같은 인물들은 이집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철학적 및 과학적 아이디어는 이집트의 출처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개념은 다른 고대 문화에도 침투했습니다. *Ma’at*과 같은 우주적 질서의 개념은 서양의 철학적 및 종교적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가 개발한 건축 원칙과 기술은 고대 세계의 후속 기념물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결론: 지속적인 영향**

    이집트의 유산은 현대 문화와 사상의 많은 측면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건축, 수학, 천문학, 종교에 대한 기여는 여전히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영감을 줍니다. *Ma’at*으로 상징되는 균형과 질서의 원칙은 개인적 및 사회적 맥락에서 조화의 중요성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업적을 돌아보면, 그들의 문명은 단지 거대한 건축물로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및 도덕적 통찰로도 주목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명하며, 질서, 균형, 신성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에 대한 소중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텍스트에서 설명하고 있는 주제는 고대 이집트의 왕 즉위 의식과 프리메이슨 의식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를 통해 두 문화 간의 상호 연관성을 탐구하려는 시도를 보입니다.

    ### 고대 이집트의 왕 즉위 의식
    이집트의 왕 즉위 의식은 매우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의식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새로운 왕(호루스)이 오시리스(이전 왕)로부터 권력을 물려받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의식은 두 가지 주요 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왕에게 기름을 바르고 상징적인 훈장을 수여하는 과정이며, 두 번째는 왕이 신으로서의 지위를 얻고 이집트의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주로 밤에 진행되며, 새벽이 되면 왕은 신성한 존재로 부활하여 국가를 통치할 준비를 마칩니다.

    ### 프리메이슨 의식과의 유사성
    프리메이슨 의식과 고대 이집트 의식 간의 유사성은 주로 상징적인 면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프리메이슨에서의 의식은 신전 내에서 진행되며, 후보자는 나침반의 모든 방향을 돌아가며 자신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새로운 왕이 신전에서 의식을 진행하며 신들로부터 지지를 얻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 비밀 사회와 의식
    텍스트는 고대 이집트에서의 비밀 의식과 비밀 사회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왕의 즉위 과정에서 매우 제한된 사람들만이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비밀 의식은 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반대 세력을 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 결론
    이 텍스트는 고대 이집트의 왕 즉위 의식과 프리메이슨 의식 간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두 문화가 어떻게 신성한 의식을 통해 권력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는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대 이집트의 의식이 현대 비밀 사회의 의식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시리스/호루스 의식에 관한 주요 출처는 피라미드 문서’ 라고 불리는 비문이다. 이 문서는 카이로 근처 사카라의 다섯 피라미드 중 가장 중요한. 제5왕조 말 우나스 왕의 피라미드 내에서 발견되었다. 물론 이것은 약 4천300년이나 된 것이지만 그래도 꽤 늦은 피라미드에 속한다. 하지만 그안에 묘사된 의식은 5천300년이나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 관한 연구는 의식의 일부 요소들을 재구성하게 해주었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찾지 못했다.” 이 연구를 통해 다양한 방들의 각 의식적 의미들이 재구성되었는데, 매장실은 지하세계를 나타내고 주실로 통하는 대기실은 수평선이나 지상세계를. 그리고 천장은 밤하늘을 의미한다.

    죽은 왕의 시신이 들어 있는 석관은 의식이 행해지던 매장실로 운반되었는데. 소수정예 멤버들이 2개의 붉은 꽃병을 부수며 대기실로 들어간다.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죽은 왕의 바(영혼)는 육신을 떠나 지하세계(매장실)를 건너가 자신의 상 안에서 유형적인 형태를 얻고 나아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수평선에 다다라 그곳에서 만유의 지배자와 재회한다. 그러고나서 이 과정은 간략한 형식으로 반복되었다.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왕 후보자?
    이 피라미드 문서의 해석에서 우리를 가장 애태우게 한 부분은 주요의식과 함께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무언의 의식은 부활과 같은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사제들이 2개의 붉은 꽃병을 부수면서 매장실을 지나 대기실로 들어갈 때에 시작되는 말로 이루어지는 의식의 일부로서 여겨져 왔다.

    이 동시에 일어나는 두 의식에 관해 세워진 유일한 가설은 말로써 이루어지는 의식이 좀 더 중요한 하이집트를 위한 것이고, 무언의 의식은 상이집트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혹시 무언의 의식이 무덤이 봉해지기 전에 인간의 형체로 부활하게 되어 있는, 일시적인 죽음에 처한 왕후보자의 운반을 위한 것이지는 않을까?
    같은 의식들이 다른 시대에도 동일한 형식으로 행해져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전문가들이 그 의식이 기원전 3200년경으로 여겨지는 가장 오래된 이집트 역사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믿고 있다.

    제6왕조(기원전 2345 ~ 2181) 피라미드에서 나온 한 기도문은 하늘의 별로의 부활과 이 땅 위의 안정 유지라는 고대 이집트 신학의 정신을 표현하고있다.
    ‘서방 국민 최초의 왕좌 위에서 오시리스의 면모를 갖추고….서신 그대여, 그대는 사라지지 않는 별들인 영혼들 가운데에 정해진 일을 하십니다. 아들이 그대의 왕위에 그대의 면모를 갖추고 서서, 그대가 위대한 신 레의 명령으로 산 자의 상좌에서 이전에 했던 일들을 합니다. 그는 보리를 경작하고 스펠트밀을 경작하여, 그대에게 바칠 것입니다. 거룩한 이름이여, 모든 생명과 주권이 그대에게 주어지고, 그대는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레가 말씀하십니다. 신의 모습을 받은 그대는 높으신 신들 가운데 위대 하십니다. 거룩한 이름이여, 그대의 바는 신들 가운데. 영혼들 가운데 서 있으며 그들은 그대를 경외하읍니다. 거룩한 이름이여. 이 이름은 산 자의 머리 위에 올려진 왕좌 위에 놓여집니다. 그들은 그대를 경외합니다. 그대의 이름은 이 땅 위에 영원히 살아 있으리니, 그대는 멸망치 않으며. 영원히 소멸치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계를 지나 두 나라의 죽은 왕들과 조우하기 위해 잠깐의 죽음을 경험하는 왕 후보자를 위한 무언의 기도를 보자.

    전능하고 영원한 레여, 우주의 건축자이자 지배자여, 만물을 창조하신 이여, 그대의 섭리로 이루어진 연약한 피조물인 우리가 그대에게 겸허하게 간청하노니 그대의 거룩한 이름 가운데에 모인 이 모임에 그대 축복의 영원한 이슬을 부으소서. 특별히 바라옵건대. 별들의 비밀을 우리와 나누고자 하는 그대의 이 종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 고난의 시간을 헤쳐 나갈 견고함을 주시고,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그대의 보호 가운데에 무사히 지나게 하셔서 결국에는 죄의 무덤으로부터 별이 되어 빛나게 하소서. 영원토록.’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의식이 아니다. 메이슨 제3등급 의식에서 지원자가 비유적인 죽음을 거쳐 마스터 메이슨으로 부활하게 되기 전에 읽히는 기도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그저 신을 레’라는 이름으로, 마스터 메이슨의 비밀’ 을 별들의 비밀’ 로 바꾸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중에 헨리 프랭크포트가 죽은 왕의 부활 의식이 후계자의 즉위식과 함께 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을 알았다.” 이로써 우리는 죽은 왕과 산 왕 모두를 위한 이중 의식에 관한 우리 생각을 확신하기 되었다. 게다가 피라미드 문서에서 새 오시리스는 새 호루스가 샛별로 여겨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에 떠다니는 같대가 나를 위해 자리 잡아 나는 그들을 건너 수평선의 레에게로 갈 수 있다네 …. 나는 그들 가운데 서리라. 달은 내 형제요 셋 별은 나의 소산이므로……’피라미드 문서 1000-1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이집트인들이 수메르의 도시 건설자들의 비밀을 통해 종교와 기술을 받아들였고 수메르인들은 종교적 목적으로 약을 사용하는 데에 상당히 정통했었다고 믿는다.
    생각해보아야 할 다음 문제는 그와 같은 부활 의식들이 오직 즉위식만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였는데, 답은 아니오’ 로 보인다. 오직 즉위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왕국(기원전 2181년경) 말, 왕실 부활 의식의 일부 형식이 매년 치러졌으며, 중왕국이 발전하면서 의식은 왕의 핵심 집단에 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부유층에도 적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왕족이 아니었던 사람들은 왕실 소수정예의 비밀 지식을 공유하지 않았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샛별은 다시 빛나고
    이제 우리는 이집트 종교의 핵심적인 요소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에서 말했듯. 이집트의 종교는 수메르 신앙들이 발전한 것이었다. 게다가 미래의 히브리 신앙들(즉 기독교)은 같은 출처에서 나온 후대의 바빌로니아 신앙들과 합쳐진 이집트 종교가 발전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에세네파/예루살렘 교회와 프리메이슨 모두에서 성별을 부활의 상징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는데, 지금 고대 이집트에서 이 주제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 피라미드 문서 357과 929, 935, 1707은 죽은 왕의 소산, 즉 자식(호루스)을 샛별로서 언급하고 있다.
    샛별을 가리키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신성한 지식” 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것은 왕위 후보자가 죽은 자의 영토에서 신들의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신/왕 호루스의 지위로 들어올려졌다는 우리의 가설을 지지한다. 샛별이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수평선을 깨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이승으로 돌아오기 전에 저승에서 위대한 비밀을 배우는 것이다.

    이 연구 단계에서. 점성술적인 디자인을 통해 피라미드의 목적을 새로이 조명하는 책이 발간되었다. 로버트 보발과 에이드리언 길버트는 어평게 기자 피라미드가 오리온좌에 있는 별들을 정교하게 모방해 위치하고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들은 또한 ‘위대한 우주의 여신 이슈타르로 나타나는 아침 샛별’ 을 포함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지구라트에서 행해졌던 의식들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전혀 다른 경로로 얻은 이 증거는 현대 프리메이슨 의식을 되짚어 올라가면서 우리 나름 대로 발견했던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집트에서 새로운 왕인 호루스는 일시적이고 비유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는(일으켜지는 프리메이슨처럼) 아침 샛별이다. 대개 금성과 동일시되는 샛별은 우리의 연구사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연결고리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렇듯 이집트 의식에서 발견한 에세네과와 프리메이슨 간의 공통점이 아무리 놀라울지라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남는다. 이집트 왕들의 비밀인 마트의 이상들과 상세한 부활의 의식이 어떤 경로로 에세네파에 이르렀을까? 그 길을 찾기 위해서는 오시리스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형제인 세트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몸이 절단된 뒤, 부활하여 별들에게로 올려진 오시리스의 기이한 운명은 무고한 고난에 대한 보상의 아주 초기 예다. 오시리스의 운명은 사회의 낮은 계층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의미와 목적을 주었다. 오시리스 숭배는 일반 이집트인들이 접근할 수 있던 장례의식이었다. 이렇듯 다른 신들이 자신들의 신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오시리스는 현지 신과 함께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예배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운명’ 을 그의 십자가에 박히심’ 으로 바꾼다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추정했던 연관성들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답을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집트 역사의 다음 기간을 연구하는 중 우리 연구의 중심인물. 히람아비프가 시간의 안개 속을 뚫고 나와 우리를 만나주었으니 말이다.

    결론
    우리는 최고의 이집트 건축자들이 수메르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수메르 이민자들이 기술과 종교를 이집트로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숙한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100년경까지 정비되었고. 상하 이집트의 두 왕국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단일왕국을 이루었다. 그런데 한 명의 신성한 통치자를 둔 두 왕국의 통일은 연구가 진행되어가면서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왕의 통치권은 이시스가 어떻게 오시리스의 조각난 시체를 이어 그로부터 아들 호루스를 갖게 되는지 말해주고 있는, 세트에 의한 오시리스의 죽음 이야기에 기반을 두었다. 호루스는 엄청난 전투에서 세트로부터 이집트의 왕권을 되찾았다. 따라서 각 왕은 호루스., 문자 그대로 신의 아들’의 화 신으로 여겨졌다. 왕이 죽으면 그는 오시리스(아버지 신)와 다시 합쳐져 죽은자의 왕국으로 가게 되고, 그의 아들이 다음의 살아 있는 신인 왕. 호루스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 왕국의 안전이 두 왕국의 협력에 달려 있고 이 협력은 2개의 기둥으로 상장되어, 하나는 북쪽에. 하나는 남쪽에 있으며. 하늘의 대들보로 연결되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한 출입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2개의 기둥의 연합을 통한이 힘의 개념은 메이슨 의식의 중심주제로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한 현대 프리메이슨과의 연결고리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공평하고 질서 잡힌 조화로운 체계 내의 공의와 진리. 정의를 의미하는 마트 개념은 우리가 프리메이슨으로서 배웠던 원칙들을 요약해 보여준다. 이 인간적이며 도덕적인 규범을 종교적인 계율이 아니었고. 법적 요구 사항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체를 위해 자유롭게 주어진 선함이었다. 또. 우리는 마트 개념은 로제타석이 해독될 때까지는 밝혀질 수 없었기에, 프리메이슨이 이집트 역사로부터 이 개념을 흉내 낼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할 길을 열어 준 로제타석은 영국 그랜드 로지가 세워진 거의 100년 후에나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리메이슨과의 2개의 정황적인 연결고리들을 세웠다. 먼저 오시리스 전설과 연관된 부활 의식의 힌트가 있었고, 두 번째로 처음엔 위대한 진리였고 나중에는 여신이 된 마트가 달의 신이자 메이슨 신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토트의 자매였다는 점이었다. 왕 즉위 의식을 연구하는 동안 우리는 비록 장례 기도문 그 자체는 기록 되지 않았지만, 죽은 왕을 오시리스와 동일시하는 부활 의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비슷한 의식들이 단지 왕 즉위 시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휠씬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과, 비밀 집단이 포함되었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찾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카이로 박물관에 있 는 유물들의 비문 번역에서 찾은 이 증거는. 로제타석이 발견되어서야 번역될 수 있었던 문서다. 즉 프리메이슨이 공개적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밝히고 난뒤 오랜 시간 후에야 번역된 것이다.
    메이슨 교육을 통해 얻은 식견으로 우리는 모든 드러난 사실에 들어맞는 이집트의 왕 즉위식을 재건해볼 수 있었다.

    메이슨 제3등급과의 가장 극적인 고리가 아침 샛별을 왕으로 언급하는 피라미드 문서에서 나왔는데. 이는 메이슨의 일으킴 의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아침 또는 신성한 별에 관한 이집트 상형문자는 메이슨 제3등급의 다섯 꼭짓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다섯 꼭짓점별과 똑같다, 이것으 로 우리는 이집트와의 관련성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해보기로 했다. 메이슨적인 관습들에 관해 부족한 증거를 채울 수 있기를 바라며


    Chapter 8: 최초의 프리메이슨

    히람 아비프, 모습을 드러내다**

    이 챕터는 프리메이슨의 기원과 관련된 미스터리한 인물인 히람 아비프, 고대 이집트, 그리고 유대인 역사 간의 연결 고리를 탐구합니다.

    고대 이집트와 1세기 유대인들 간의 연관성은 모세를 통해 이집트 왕실과 연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저자들은 프리메이슨의 세 번째 등급에서 히람 아비프 이야기를 처음 접합니다. 히람은 불명예보다 죽음을 택한 영웅으로, 프리메이슨의 핵심 원칙을 구현한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는 솔로몬 성전의 우두머리 건축가로 등장하지만, 구약성서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왜 성경에 히람 아비프 같은 중요한 인물이 빠져 있는지 의문을 품으며, 그가 역사에서 간과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을 상징하는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죽음은 거짓과 불명예의 오욕에 비하면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이 웅대한 진리 가운데에 프리메이슨의 연대기는 우리의 그랜드 마스터 히람 아비프의 확고한 절개와 때 이른 죽음 속에서 영광스런 예를 전해준다. 그는 그대가 분명히 알고 있듯이. 자신이 우두머리 건축자로 있었던 솔로몬 왕 성전 건설현장에서 건물이 완성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만일 구약성서의 <열왕기> 저자들이 그 우두머리 건축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특히 그의 살해의 관점에서 그런 중요한 인물을 무시했을 리는 없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휠씬 후에 만들어진 허구 인물로, 단일 드라마를 이루기 위해 역사에서 경시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메이슨 영웅의 실제 이름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낸 유일한 타당한 설명은 ‘히람’이 히브리어로 ‘귀족의’ 나 ‘왕의’를 뜻하고 ‘아비프’ 는 사라진 자 를 뜻하는 불어 구어와 같다는 것이다. 즉 문자 그대로 ‘사라진 왕’ 이라는 뜻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창세기> 뒷장들은 이집트인들과 원시 이스라엘인들 간의 관용과 협동을 그린다. 하지만 <출애굽기>는 두 민족 사이의 지독한 적의를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관계가 갑작스레 변한 이유들은 소위 힉소스 왕조와 그 기간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한층 분명해졌다. 아울러 전체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드러난 히람 아비프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도 함께.

    **이집트 왕국의 붕괴**

    이어서 고대 이집트의 역사, 특히 기원전 3000년경 즉 중기 청동기 시대 말 이집트 정부의 붕괴와 사회적 와해에 대해 다룹니다. 이 시기는 외부의 침입자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이집트의 정신과 힘이 약화된 시기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힉소스인들이 등장하며, 제2중간기(기원전 1780-1560년) 동안 이집트를 지배하게 됩니다. ‘힉소스’는 ‘양치기 왕’이 아닌 ‘사막의 왕자’를 의미하는 이집트어 ‘히카우-코스hikau-khoswet’ 에서 나왔으며, 이들은 주로 셈족으로 구성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온 아시아계 혼혈 집단이었습니다.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한 시점은 성경에서 히브리 민족이 처음으로 언급된 시기와 일치합니다.

    그들의 권력 탈취 과정 말에 불가피하게 저항이 따른다. 그 결과, 일부 선진 도시들이 불타오르고 신전들이 파괴되어 기원전 1720년경 이집트 수도 멤피스가 완전히 힉소스의 손에 넘어가는 시점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힉소스인들은 마트를 믿지 않았고,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자신들의 명분에 방해가 되는 자는 누구든 잔인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일단 권력을쥐자 그들은 까다로운 압제자가 아니었고, 이집트 당국 또한 그들과 협력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하여 힉소스인들의 통치력은 기원전 18세기에 상이집트까지 확대된다.

    출신지에 따라 오늘날 이스라엘과 시리아인이라고 불리는 힉소스인들은 후에 이스라엘인들로 알려지게 된 사람들과 같은 서부 셈족 언어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힉소스인들은 사실상 유대인들이었을까? 답은 아니오 가 되겠지만,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유대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이 하비루Habiru(히브리Hebrew)라고 불렸던, 흩어져 살던 그 유목 종족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셈족 아시아계였지만 사실상 결코 같은 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힉소스/하비루 사람들이 나중에 이스라엘 종족들과 결국에는 유대인들이 된 종족들 간의 융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가 힉소스인들과 유대인들 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믿는 데에는 몇몇 이유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성서에서 유대인들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한 시기는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힉소스를 몰아낸 때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바로 예루살렘으로 말이다!

    최근에 밝혀지는 지질학상 증거는 대부분의 중동의 사막 상태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졌으며, 그리 멀지 않은 5천 년이나 6천 년 전 이집트 주변 지역은 휠씬 푸르고 비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기원전 2000년에 있었던 극적인 기후 변화로, 근동 전반에 가뭄이 발생했다고 기록들은 말하고 있다. 마트의 원리를 믿는 관대한 이집트인들은 유랑하는 하비루에게 물과, 나일 삼각주 외부 상황이 힘들 때에 양을 키울 수 있는 땅을 제공했다. 다음은 <창세기> 12: 10에 나온 확실한 증거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통제할 힘이 부족했던 이집트 사회의 쇠퇴기에 이 물이 고픈 아시아인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필요한 것을 채운 뒤에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그 결과 이민 정책이 없던 그 나라는 유목민들로 넘쳐나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혼동을 틈타 이득을 노리던 자들 또한 그들을 뒤따르는데, 그들은 훨씬 더 발달된 문명의 소유자들이었다. 이 셈족 도시인들인 힉소스인들은 자만하고 있던 이집트인들보다 호전적이었으며, 말이 끄는 전차를 비롯한 고도로 발달된 무기로 평화를 사랑하는 원주민들로부터 별 심한 저항 없이 원하는 것을 취할 수 있었다

    **힉소스 왕조**

    저자들은 힉소스 왕조가 이집트에 끼친 영향을 다룹니다.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의 관습과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이집트인들에게 완전히 수용되지 못했습니다. 힉소스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레의 아들’로 칭하며 신적 지위를 주장했지만, 이집트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비밀스러운 의식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이집트인들에게 힉소스인들이 외부인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힉소스 기간 동안 하비루 부족민들이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도시 생활에 흡수되었다는 것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이들이 자신의 몫을 늘리고 도시 생활의 이익을 누릴 유일한 길은 스스로를 이집트 가족의 노예로 내놓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노예가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 계약을 맺는 시종과 같은 것으로, 급료는 그리 좋지 않았겠지만 삶의 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이었다.
    정착한 힉소스 왕조는 조상彫像들과 부조, 예술 작품과 뛰어난 문학, 기술 제품의 생산뿐만 아니라 신전 건축도 후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문화적 유산이 적었던 그들은 재빨리 이집트의 방식과 태도를 흡수한 듯하다. 한편, 너무나 개방적으로 과거의 영화에만 안주하며 나라의 방어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집트인들에게 힉소스 왕조 기간의 경험은 강한 교훈이 된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정신의 부활을 위한 기초가 된 새로운 건설적인 비전을 갖게 된다. 그 결과 바로 우리가 신왕국으로 부르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구수도 멤피스의 통치권은 빼앗겼지만, 진정한 이집트 군주의 요소들은 상이집트 도시 테베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록으로 볼 때에, 테베 시민들은 아시아 지배자들의 통치권을 인정했던 것이 분명하며, 좋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힉소스 왕조가 대부분의 이집트 문화와 종교적 의식들에 흡수되면서, 불가피하게 정치-종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침략자들은 물리적 권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힘도 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힉소스 통치자 크얀(Khyan 또는 Khayana) 왕은 ‘선한 신’과 ‘레의 아들’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왕호인 ‘레처럼 강한 지Se-user-en-re’ 를 사용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서 호루스 이름인 ‘열방을 품는 자Embracer-of-Regions’를 만드는데, 이는 전 세계를 지배한다는 의미다. 이렇듯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한 힉소스 통치자의 주장은 모든 이집트 사람들을 격분케 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현대 이집트학자들이 아직 충분히 살피지 못한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앞서 보았듯, 새로운 호루스를 무적으로 만드는 왕 즉위 과정에는 굉장히 특별한 부분이 있었는데, 힉소스 왕조가 이집트의 권력과 종교를 아무리 철저히 모방했다 해도 궁극적인 영예인 이 의식에서는 제외되었다. 어떻게 이방인이 진짜 이집트 왕과 그 내부 소수정예에게만 알려진 극도로 비밀스러운 입문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간단히 자신의 이름을 Khyan에서 Seuserenre로 바꾸고 자신을 호루스라 명할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No . 이집트인들이 그들 최대의 비밀을 이 야만인들과 공유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이 강력한 호칭을 필사적으로 원했던 크얀은 합법적으로는 그 비밀에 접근할 수 없었기에, 공허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편, 이집트인들과 새 주인 간의 관계는 겉으로는 좋아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집트인들은 분노로 떨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비록 이집트 스타일과 풍습을 흉내내긴 했지만 힉소스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족속이었다. 힉소스를 이집트에 접목시키는 것은 기껏해야 피상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억양으로 이집트 말을 했고, 수염을 길렸으며(이집트인들은 상중을 제외하고는 매일 면도를 했다). 별스러운 패션 감각을 지녔고, 당나귀 대신 말이 끄는, 2륜 전차라고 불리던 바퀴 달린 기계로 이동했다.

    **원본 비밀의 유실**

    이 장에서는 프리메이슨의 기원과 고대 이집트, 특히 힉소스 왕조와의 연관성을 탐구하며, 히람 아비프 이야기의 배경을 고대 이집트의 역사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후기 중왕국 시기의 연구를 통해 힉소스 왕조와 진정한 이집트 왕실 혈통 간의 긴장감이 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주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힉소스 왕조가 이집트 왕실의 비밀 부활 의식에 접근하려 했지만, 이집트인들에게 이를 허용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음을 강조합니다.

    힉소스인들은 수 세대에 걸쳐 이집트 종교를 받아들였고, 자신들이 호루스의 비밀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으며, 스스로를 호루스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들은 이 시기에 있었던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연구하며,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가 이집트 왕 세케넨레 타오 2세와 이집트 왕명 ‘A-user-re레와 같이 위대하고 강력하도다’와 ‘상하 이집트의 왕-레의 아들’칭호를 가졌던 중요한 힉소스 왕 아페피 1세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힉소스 왕조의 권력 투쟁**

    크리스는 힉소스 왕 아페피 1세가 고대 이집트의 신화적 악마인 아포피스와 동일시되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아포피스는 오시리스를 죽인 신 세트를 주신으로 택한 힉소스인들에게 있어, 이집트인들에게 경멸과 악의 상징이었습니다. 아포피스는 혼돈과 어둠을 상징하며, 이집트인들에게 최대의 공포였는데, 힉소스 왕이 이 이름을 채택한 것은 이집트 왕실의 비밀을 얻으려는 치밀한 계획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호전적이었고 자기중심적이었던 힉소스인들은 모든 이집트 왕들이 된다고 여겨졌던 신 오시리스를 죽인 세트를 주신으로 택해 스스로를 세트와 동일시했다. 그럼으로써 이집트인들에 대한 경멸감과 악의 세력과의 동맹을 보였다. 마트 개념은 아포피스에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으로, 그 관대함 덕분에 선조들이 이집트인들의 나라를 빼앗을 수 있었다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마트의 반대 축에 놓인 개념은 이스페트. 이는 이기주의와 거짓, 불공평과 같은 부정적인 개념을 상징하는데,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이 ‘이스페트’ 화신의 우두머리가 용의 형상을 띤 끔직한 뱀 신…바로 아포피스라고 불리던 악마였다. 나는 이 악의 세력이 힉소스 왕과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마트와 극을 이루는 괴물의 호칭에는 “악마 형상을 한 자” 와 “악마의 특성을 가진 자” 등이 있었고 이집트인들에게 그는 태초의 혼돈 그 자체였다. 이 힉소스 왕이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이 뱀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오로지 소리만 지를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었는데,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매일 쫓겨 다녔다. 모든 이집트인들의 최대 공포가 사악한 뱀 아포피스가 어느 어두운 밤, 레와의 씨움에서 승리하여 다음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수긍이 갈 만한 일이다. 그들은 이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매일 태양신의 신전에서 기도문을 낭송함으로써 빛과 어둠세력 간의 계속되는 씨움을 지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아포피스 타도의 서”라는 이름의 기도문 모음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이것은 신전에 보관되었던 비밀 책으로 아포피스의 악을 몰아내기 위한 수백의 마법 주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초보자도 가능한, 으깨어서 형태 없는 덩어리로 만들 수 있고 풀로 태우거나 칼로 절단할 수도 있는 왁스 뱀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책은 학생에게 이 행동을 매일 아침, 정오, 밤에, 그리고 특히 구름이 태양을 가린 순간에 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아바리스에서 남쪽으로 400마일 떨어져 있는 도시 테베는 비록 힉소스 인들의 권력에 굴복하고 아포피스의 세금 징수자들에게 세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이집트 왕조의 혈통을 지켜 나갔다. 고립과 가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테베인들은 자신들이 귀하게 여겼던 중왕국 시대의 관습들을 유지하고자 고투했다. 힉소스인들(그리고 그들의 꼭두각시 왕 쿠시)은 테베인들에게 시리아의 목재와 투라의 석회암, 누비아의 황금, 수단의 흑단과 상아 공급을 중단하고, 오늘날 아스완과 와디 함마마트에 있는 채석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따라서 테베인들은 스스로 건축술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훌륭한 건물을 만들어냈다. 비록 돌보다는 점토 벽돌을 주로 사용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정신과 결단력이 부활하고, 열악한 생활의 질 가운데에서도 학문과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도시 왕국은 억압과 무질서로부터 스스로를 들어 올려, 하이집트에 있는 아시아인들에 대항하여 입지를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직감에는, 통치 34년 정도가 되자, 아포피스는 두 왕국의 “적법한” 왕으로서 자신의 권리인 영원한 삶을 얻기 위해 테베의 왕에게 오시리스가 되는 비밀을 요청했던 것 같다. 강한 젊은이, 테베 왕 세케넨레 타오 2세는 자신이 호루스라고 여기며 그 생득권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것도 “암흑의 뱀”을 따라 이름을 지은 수염 난 아시아인과는 특히나 말이다. 그의 즉각적인 거절로 둘 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아포피스왕은 가능한 모든 면에서 세케넨레를 공격하는 데에 자신의 권력을 쓰기 시작했다. 이 충돌의 특히 중요한 예는 아바리스로부터 400마일 넘게 떨어져 있는 테베에 아포피스가 보낸 명령서로, 세케넨레에게 소음에 관해 불평하고있다.
    ‘도시 동쪽에 있는 하마 못을 없애시오. 시끄러운 소리에 밤이고 낮이고 잠을 이룰 수 없으니 말이오.’

    ‘이 명령은 그저 세케넨레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우스꽝스러운 게임이 아니었다. 대신 신성한 통치권과 다름없는 것을 얻기 위한 아주 분명한 권력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아포피스는 이미 필요한 모든 나라의 권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갖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이는 부활 및 신들의 축복에 관한 비밀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굉장히 정치적이다. 테베인들은 도시 서쪽에 있는 저수지에서 하마를 죽이는 의식을 되살렸는데, 이는 이집트 왕국의 안전을 위한 고대의 거룩한 의식으로서 분명히 아포피스의 성질을 건드렸을 것이다. 특히나 하마는 힉소스의 주요 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마 의식은 다섯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막과 3개의 장 그리고 후막이었다. 연극의 목적은, 호루스의 적에 대한 승리 및 두 나라의 왕으로서의 즉위와,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최후의 승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히 호루스 역할을 맡아 연기했던 왕은, 1장에서 메센의 지배자이자 상하 이집트를 대표하는 베뎃의 호루스(삼각주 지역에 있는 베댓에서의 호루스 신의 지역적인 모습)로서 번갈아 수컷 하마 한 마리에게 10개의 작살을 던진다. 3장에서 희생된 하마는 세트의 대리로서 두번 절단된다.
    ‘권력 싸움은 한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포피스가 테베 왕의 무례를 한 번에 끝내고 비밀을 얻어내기로 했을 것이다. 결과는 세케넨레를 죽인 뒤 이집트 왕의 통치를 되찾는 것이었다.’

    **세케넨레 타오 2세와 히람 아비프의 기원**

    크리스와 로버트는 이 연구를 통해,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가 세케넨레 타오 2세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세케넨레는 테베의 왕으로서 힉소스 왕조에 저항하며, 이집트의 전통과 신성한 비밀을 지키려 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은 힉소스 왕조와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히람 아비프 이야기의 근간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 가설이 히람 아비프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며, 프리메이슨의 뿌리가 고대 이집트의 신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장은 고대 이집트와 힉소스 왕조, 그리고 프리메이슨 간의 복잡한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로, 역사적 인물과 전설적 이야기를 연결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성서적 증거**

    이 챕터에서는 이집트 역사와 메이슨 의식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성서 속 인물들, 특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역사적 위치를 탐구합니다.
    이 인물들의 연대를 정하는 것은 다윗과 솔로몬 이후 유대 역사의 후기 인물들의 연대를 정하는 것보다 휠씬 더 어렵다는 사실은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 하는 바다. 후자의 경우는 역사상 상호 참조할 휠씬 분명한 이정표들이 있으니 말이다. 이 유명한 다섯 인물들이 역사상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밝혀낼 논리적인 시작점은 아시아인, 또는 원시 유대인이었던 요셉으로, 성서에 따르면 이집트에 와서 왕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이집트에서 권력자가 된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전설은 구전을 최초로 기록했던 후대의 필사가들에 의해 심하게 미화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낙타로 짐을 날랐다는 것과 동전의 사용에 대한 언급 또한 모두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요셉의 연대를 가장 최근으로 잡아보아도, 둘 다 요셉보다 수백 년 뒤에야 존재했기 때문이다.
    요셉의 시대에 낙타와 동전의 사용은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에는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일흔다섯 살에 처음으로 이집트에 갔고 백 살에 그의 아들 이삭을 낳았으며, 그 75년 후에 죽었다고 한다.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나이 예순 때에 야곱은 열 두 아들이 있었으며 열한 번째가 바로 요셉이었다. 여기에 약간의 과장이 (특히 아브라함의 나이에) 있었을 것이다. 좀 더 현실적으로 기간을 따지기 위해 우리는 요셉이 서른 살에서 예순 살 사이에 이집트에서 최고의 권력을 구가했을 당시를 추정해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그가 최고 관직에 있던 기간과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이집트에 도착했던 사이의 기간을 되짚어 올라가보았다.

    아내들과 그들의 여종들을 포함한 많은 여인으로부터 자식을 보았던 야곱에게 요셉은 어린 자식들 중의 하나였으므로,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아버지 야곱이 상대적으로 늙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야곱이 예순이었다고 추정해보자. 우리는 이삭이 야곱을 예순 살에 낳았다는 성서의 말을 인정 할 수는 있지만, 아브라함의 나이를 백 살에서 좀 더 조리에 맞는 일흔 살로 내려야 할 것이다. 이 나이들은 그 이야기 속으로 교묘히 스며 들어간, 불 보듯 뻔하게 불가능한 나이들을 배제하고 성서에 주어진 정보의 참뜻을 따라 유추해낸 것이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이집트인들이 그녀를 빼앗아 가기 위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했던 아브라함은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인 체했다고 말하고 있다. 별로 타당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나중에 늙었음에도 사랑하여 결국 이삭을 낳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들 둘이 처음에 이집트에 갔을 때에는 젊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역사적 날짜를 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단서 하나를 얻는다. 즉 말이 끄는 이륜마차의 사용에 대한 언급인데, 이는 토착 왕들이 아닌 아시아의 지배자들이 쓰던 탈것으로, 힉소스 시대의 것이 분명하다. 침략자들 가운데에 셈족 요소들이 있었으며, 따라서 이는 셈족 이민자들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기간이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힉소스인들이 추방된 뒤에 ‘요셉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왕’이 부흥 했으며, 이집트에 남은 이방인들은 <출애굽기> 초반에 묘사된 바와 같은 취급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해 왔다.
    가나안이 가뭄으로 허덕이는 동안 이집트로 온 히브리 이민자들과 이집트에서의 힉소스 통치자들의 출현이 요셉의 정치적 출세와 동시에 일어났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요셉 시대의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왕국으로 오는 것을 환영했는데, 왜나하면 그 자신이 힉소스인 중의 하나이자 히브리인들처럼 셈족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힉소스인들이 정복되었을 때에 새로운 이집트 군주는 히브리인들을 힉소스 편으로 여겨 노예로 삼았다고 알려져 온다.
    <출애굽기> 1:8-9는, 요셉과 누구인지 모르는 파라오의 가장 확실한 연대를 제공해주고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힉소스 시대와의 관련성을 탐구합니다. 힉소스 왕조는 셈족(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를 다스렸던 시기로, 요셉이 힉소스 왕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서의 기록과 이집트의 역사를 비교하여, 요셉이 이집트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시기가 힉소스 왕조 시절이라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저자는 요셉이 힉소스 왕 아포피스의 장관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시간적 연대**

    저자는 아브라함이 최초로 이집트에 들어온 연대를 기원전 1780년으로 추정하고, 그의 자손들의 생애를 시간적으로 배치합니다. 이 계산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이와 이집트 역사 사이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아브라함이 힉소스 통치의 시작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힉소스가 “사막의 왕자들”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이 힉소스의 고위층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1780년 아브라함이 최초로 이집트에 들어감(아마 30세 정도).
    1740년 이삭 탄생(아버지 아브라함은 매우 늙은 것으로 알려짐. 70세로 하자)
    1680년 야곱 탄생(아버지 이삭의 나이 60세로 알려짐)
    1620년 요셉 탄생(늙은 것으로 알려진 아버지 야곱의 가능한 나이는 60세 정도)
    1570년 요셉 장관(가능한 나이 50세)

    여기 제시된 나이들은 논리적으로 가능할 뿐 아니라, 성서가 제공하는 정보에도 부합한다. 그리고 아포피스와 세케넨레 간의 충돌로부터 되짚어 올라가보니 아브라함이 힉소스 통치의 시작으로 알려진 바로 그해에 이집트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었다! 즉 아브라함은 힉소스 그 자신이었고 어쩌면 왕자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기억하자, ‘힉소스’ 라는 이집트 단어가 ‘사막의 왕자들’ 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또, 그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온 고귀한 태생의 남자였다는 것을.

    우리는 이 이야기들의 저자들이 거의 천 년을 왜곡했으며, 모든 미신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해석하고 필사한 역사 속에 자신들의 선입견과 신앙을 집어넣고자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인간의 기원에 관해 아득하게 오래전의 설명으로 시작하고 있는 <창세기>는, 그 먼 옛날의 신화에서 필경사들에게 상대적으로 최근인 역사로 곧바로 옮겨간다. 어디에도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 어딘가의 기간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아시아인들의 이집트인 정복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들은 이 기간을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수치스러위했던 것일까? 알 도리는 없지만 자신들의 역사에서 이토록 중요한 기간에 대한 설명이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다.

    **결론**

    이 챕터는 성서 기록과 이집트 역사 사이의 연관성을 통해 요셉이 이집트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 시대적 배경을 분석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들어온 시기와 힉소스 왕조의 출현을 연결 지으며, 요셉이 힉소스 왕조의 일원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저자는 성서의 기록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 합니다.

    이 챕터에서 *The Hiram Key*의 저자들은 고대 이집트 의식과 프리메이슨 전통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하면서 히람 아비프(Hiram Abiff)의 전설적인 인물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프리메이슨의 핵심 인물인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가 이집트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히람 아비프의 살해**

    챕터는 상이집트의 파라오 세케넨레가 하이집트를 침략한 힉소스(Hyksos) 왕 아포피스(Apophis)와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는 개념을 소개하며 시작됩니다. 세케넨레는 이러한 어둠의 세력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정오에 태양신 아멘-레(Amun-Re)의 신전을 방문했습니다. 정오에는 태양이 최고조에 다다라 아포피스의 힘이 가장 약해지며, 이는 프리메이슨의 제3등급 의식에서 “우리의 마스터 히람 아비프는 정오에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과 깊이 연결된다는 점이 이제야 분명해집니다.

    **사건의 재구성**

    저자들은 세케넨레가 정오 기도를 마친 후 신전에서 나오는 길에 아포피스가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매복을 당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이 암살자들은 이미 두 명의 고참 제사장들에게서 오시리스의 비밀을 알아내려다 실패하자 그들을 죽였고, 각기 다른 출구에서 세케넨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케넨레는 신전을 떠나려 했지만, 비밀을 요구하는 이 암살자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히람 아비프처럼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 공격을 받게 됩니다.

    **프리메이슨과의 유사성**

    세케넨레의 살해 묘사는 프리메이슨 전설의 히람 아비프 이야기와 병행됩니다. 첫 번째 암살자는 세케넨레의 관자놀이를 자로 때렸지만, 그 충격은 약하여 세케넨레는 비틀거리게 됩니다. 두 번째 암살자는 수준기로 그의 반대쪽 관자놀이를 내리쳐 그를 무릎 꿇게 했습니다. 마지막 암살자는 무거운 망치로 그의 이마를 내려쳐 세케넨레를 즉사시킵니다. 이 비극적인 결말은 히람 아비프가 세 명의 무법자들에게 공격받고 결국 살해되는 프리메이슨 이야기를 매우 유사하게 반영합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고는 남쪽 문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곳에서 그는 3명의 악한 중 첫 번째와 만나는데, 그자는 자두나무 자로 무장을 하고, 우리의 마스터 세케넨레를 위협하여 오시리스의 진정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거절 시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맹세한 대로 세케넨레는, 그 비밀들은 세상에서 세 사람밖에 모르며 나머지 둘의 동의가 없이는 누설할 수도,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간직한 신성한 비밀을 누설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자, 악한은 마스터의 이마를 겨냥해 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하지만 세케넨레의 단호한 태도에 놀란 나머지, 자가 오른쪽 관자놀이를 스치기만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해 세케넨레는 비틀거리며 왼쪽 무릎을 대고 땅에 쓰러졌다.
    그는 일어서서는 서쪽 입구로 급히 갔는데, 그곳에서 두 번째 악한과 마주친다. 이때에도 마찬가지의 단호함으로 대답하자 수준기로 무장한 악한은 왼쪽 관자놀이를 과격하게 내려쳐서, 세케넨레는 오른쪽 무릎을 굽혀 땅에 주저앉게 된다.
    남쪽과 서쪽 모두에서의 탈출의 기회가 차단된 것을 알게 된 우리의 마스터는 힘없이 피를 흘리며 동쪽 문으로 비틀비틀 나아갔는데, 그곳에서는 세 번째 악한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무례한 요구에 비슷한 대답을 얻은 (우리의 마스터는 이 가장 힘든 순간에조차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 자는 무거운 돌망치로 마스터의 이마 중앙을 맹렬하게 내려치고, 그 결과 우리의 마스터는 발밑에 쓰러져 죽고 만다.’

    이집트의 왕의 즉위의 비밀은 세케넨레, 즉 우리가 히람 아비프라고 부르는 자와 함께 죽었다….’사라진 왕.’

    **히람 아비프의 정체**

    저자들은 히람 아비프라는 전설적인 마스터 메이슨이 세케넨레 타오의 알레고리적 표현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1881년에 발견된 세케넨레의 미라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깊이 파고들며, 이 미라가 프리메이슨 의식과 저자들이 재구성한 세케넨레의 암살 이야기에서 묘사된 부상과 일치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상에는 이마 중앙에 깊이 패인 상처, 오른쪽 눈구멍과 광대뼈의 골절, 그리고 머리 뒤쪽에 가해진 강력한 타격으로 인한 두개골의 파열이 포함됩니다.

    **미라의 발견**

    챕터는 1881년 에밀 브루크쉬(Emil Brugsch)에 의해 세케넨레의 미라가 람세스 2세의 미라와 함께 발견된 이야기를 다룹니다. 세케넨레의 미라는 초기 부패 상태에 있었으며, 프리메이슨 전설과 일치하는 끔찍한 부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저자들은 세케넨레의 부상과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묘사된 도구(자, 수준기, 망치) 사이의 상징적 연관성을 강조하며, 이 도구들이 세케넨레의 살해에 사용된 무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제안합니다.

    ‘1881년 7월 에밀 부룩쉬는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발견했는데, 같은 곳에 람세스의 미라보다 약 300년은 더 오래되었고 특히 그 부패한 냄새로 눈에 띄는 다른 왕족의 시신이 있었다. 표시에 따르면, 이것은 힉소스 기간 동안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테베에서 감금되었던 토착 이집트 통치자들 중의 하나, 세케넨레 타오의 시신으로, 그는 누구의 눈에도 끔찍한 최후를 맞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이마 중간은 맞아서 푹 파였다… 다른 가격으로 오른쪽 눈구멍과 오른쪽 광대뼈, 코가 골절되었다. 세 번째 것은 그의 왼쪽 귀 뒤에 내려쳐져, 유양돌기를 산산이 부수고 목의 첫 번째 척추에서 끝이 났다. 생전에는 분명히 큰 키에 검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잘생긴 젊은 남자였겠지만, 세케넨레의 경직된 표정은 그가 고통 속에 죽었음을 보여준다. 죽은 뒤에도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 듯하다. 그의 시신이 미라로 보존되기 전에 얼마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으니 말이다. 냄새와 초기에 부패한 흔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집트 기록들에는 세케넨레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힉소스인들/가나안인들의 손에 의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이안 월슨Ian Wilson: <출애굽의 수수께끼 The Exodus Enigma>

    ‘세케넨레의 두개골에 난 끔찍한 상처는 단검과 도끼 창과 아마 철퇴로도 무장했을 적어도 두 사람의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
    피터 클레이턴Peter Clayton: <파라오 연대기 Chronicle of the Pharaohs>

    **프리메이슨 의식과의 연결**

    챕터는 또한 히람 아비프의 시신이 동료 메이슨들에 의해 발견된 후 아카시아 가지로 표시되었다는 프리메이슨 전통을 언급하며, 이 이야기가 세케넨레의 시신이 방치되었다가 발견되어 미라로 보존된 역사적 기록과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들은 세케넨레가 폭력의 흔적이 명확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이집트 왕족의 미라라는 점이 흥미롭다고 강조하며, 그가 히람 아비프 전설의 역사적 인물일 가능성을 강화합니다.

    **결론**

    챕터는 세케넨레의 정체가 히람 아비프일 수 있다는 발견이 프리메이슨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저자들은 세케넨레의 시신이 카이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반면,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는 프리메이슨 의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부활을 나타낸다고 주장합니다. 이 고대 이집트의 의식과 프리메이슨 의식 사이의 연결은 프리메이슨의 기원과 고대의 신비에 대한 도발적인 관점을 제공하며, 더 많은 숨겨진 연결을 찾기 위해 프리메이슨 의식을 추가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제8장 “최초의 프리메이슨”에서는 프리메이슨의 기원을 성서의 인물, 이집트 역사, 그리고 히람 아비프라는 전설적인 인물과 연관 지어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성경의 이야기와 이집트 왕실의 음모를 연결하여 프리메이슨리의 뿌리를 고대 이집트로까지 확장하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을 제시합니다.

    ### 히람 아비프의 살해자들

    이 장은 프리메이슨 전설에서 히람 아비프를 죽인 세 명의 살해자, 즉 주벨로(Jubelo), 주벨라(Jubela), 주벨럼(Jubelum)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합니다. 이들은 모두 ‘주이스(Juwes)’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며, 공통적으로 포함된 “주벨(Jubel)”은 산을 뜻하는 아라비아어로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사건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저자들은 이 상징적 해석보다는 이 전설을 영감으로 삼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밝히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 성서적 단서와 역사적 배경

    저자들은 성경의 이야기, 특히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검토하며, 이를 이집트 역사적 사건과 연결 지으려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려갔던 이야기와 나중에 이스라엘이 열두 지파로 나뉘는 과정에서 특정 지파들, 특히 르우벤 지파가 중심에서 벗어나고 유다 지파가 중심에 서게 되는 과정을 분석합니다. 창세기 49장 6절에 나오는 애매한 구절을 통해 저자들은 시므온과 레위의 행동을 언급하며, 이들이 중요한 살인 사건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합니다.

    이미 성서에 설명된 요셉의 정황이 그가 힉소스 왕 아포피스의 고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 현 상황에서, 그가 세케넨레로부터 비밀을 알아내려는 음모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여겨진다. 성서 또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이름이 인생의 후반기에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로 바뀌었고 그의 열두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이 되었다고 말해준다. 물론 이것은 자신들의 나라가 언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지 확실한 연대를 찾던 유대의 후기 저자들의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야곱, 즉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창세기>의 저자들이 기록을 시작했을 당시 나름대로의 지위에 적절해 보이는 역사적 정황들에 처해 있었다. 르우벤족 Reuben은 맏이였으나 장자권을 잃었고, 유다족Judah은 새로운 핵심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인 후손들을 ‘유대인Jews’ 이라고 하지 ‘르우벤 인Rubes’ 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이 성서 구절들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던 우리는 <창세기> 49:6에서 아주 이상한 구절을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어떤 명백한 의미도, 또한 알려진 것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그 구절은 야곱이 죽으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부족장인 그의 아들들의 행동을 돌이켜보는 순간을 묘사한다.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비밀에 들어오지 말며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내 명예야, 너는 그들과 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완고함으로 벽을 파 내려갔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에 포함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음에도 설명되지 않은 살해사건에 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어떤 비밀을 찾으려고 했을까? 누가 살해당했나?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것에 대한 예언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해석을 집어치우고 좀더 사리에 맞는 가설을 제시했다. 구절 중 ‘너는 그들의 비밀에 들어오지 말며 come not thou into their secret’ 의 뜻이 모호하다. 현대 영어에서 이것의 의미는 ‘너는 그들의 비밀을 얻어내지 못했다’ 다! 전체를 살펴보면 너는 비밀을 얻어내지도 못하고 사태만 악화시키고는, 홧김에 그를 죽여 모든 것을 망치고 우리를 위기에 몰아넣었도다!’ 라는 비난이다.

    이 알려지지 않은 살인을 저지른, 장차 이스라엘의 두 부족을 이루는 형제는 시므온과 레위로, 야곱, 즉 이스라엘이 멸시하던 눈먼 여인 레아에서 낳은 아들들이다. 이 부족들은 그들이 ‘한 남자를 죽인 것’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익명의 희생자는 누구였을까? 물론 우리가 히람 아비프의 살인자들이 정말 시므온과 레위로 불리고, 요셉의 실제 형제들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익명의 남자를 죽였기에 이스라엘의 두 부족이 불명예를 얻게 된 민간전승이 이 구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해 보였다. 게다가, 비록 살해당한 자가 누구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왜 이 범죄가 유대인들의 역사에 포함될 만큼 중요했던 것일까?

    ### 이집트 역사와의 연결

    저자들은 이 미확인된 살인 사건이 이집트의 힉소스 침입자들과의 싸움에서 중요한 인물인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의 암살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요셉이 힉소스 왕 아포피스 아래에서 고위 관료로 일하며, 세케넨레의 비밀을 캐내려는 음모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 음모가 실패하면서 세케넨레의 암살로 이어지고, 이는 이집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왕은 자신의 꿈을 해몽하는 능력으로 고관직에 오른 장관 요셉을 불러들여, 지체 없이 세케넨레로부터 비밀을 얻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집트의 내세를 누리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그 왕도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임무를 맡게 된 요셉에게 2명의 배다른 형제 시므온과 레위 말고 보내기에 더 좋은 자가 어디 있었을까? 그들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다 해도 별문제는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바로 그들이 몇 년 전 요셉을 노예로 팔아 먹은 자들이 아니었던가? 만일 그들이 성공한다면, 그래 좋다. 요셉은 영웅이 되고 그의 형제들은 오래전 빚을 갚는 셈이 될 터였다.

    ### 음모의 전개

    저자들은 요셉이 시므온과 레위와 함께 테베에 침투하여 세케넨레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합니다. 그들은 야망 있는 젊은 제사장(저자들은 그를 ‘주벨로’라고 부릅니다)의 도움을 받아 세케넨레를 배반하게 하고, 그러나 제사장들이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면서 음모가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세케넨레를 직접 공격하여 살해하게 됩니다.

    형제들은 해야 할 일과 도시 구조를 완전히 익혔다. 주의를 끝지 않기 위해 테베에 들어가기 전에 눈에 띄는 힉소스 수염을 깎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도시에 들어가자 그들은 야심 있고 귀가 얇기로 유명한 아멘-레 신전의 젊은 왕족 제사장을 만났다. 형제들은 아포피스는 엄청나게 강력하며 만일 그가 세케넨레의 비밀을 얻지 못하면 테베를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제사장(우리는 그를 주벨로라고 부를 것이다), 그만이 그들을 도와 비밀을 빼내어 전체 백성을 재앙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단 비밀을 얻어내고 세케넨레와의 정치적 분쟁이 해결되면 그가 아포피스의 대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주벨로는 이 아시아인들의 위협에 너무나도 놀랐지만, 힉소스인들이 화났을 때에 멤피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비록 그것이 사악한 아포피스를 위한 것일지라도. 주벨로는 시므온과 레위에게 비밀을 알고 있는 2명의 제사장들을 알려주고, 그들을 덮칠 최적의 시간과 장소를 설명한다. 그들을 함정으로 유인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둘 모두 잡혔지만 어떠한 세부사항도 말하지 않고 죽음을 당한다. 따라서 이제는 최후의 선택만이 남게 된다. 즉 왕 그 자신에 대한 공격.
    공포에 질렸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선 주벨로는 태양이 막 그 최고점에 달했을 때에 아멘-레의 신전에 공모자들을 데리고 간다. 잠시후 문에 나타난 왕은 비밀을 말할 것을 요구당한다. 거절의 대가로 첫 타격을 맞은 뒤, 몇 분 사이에 왕 세케넨레는 흥건한 피 속에서 신전 바닥에 쓰러져 죽는다. 무모한 화와 좌절감으로 형제 중 하나는 거꾸러진 시신을 두번 더 친다. 주벨로는 두려움으로 몸에 고통을 느낀다.
    셋 모두 자신들이 갑자기 세상에서 친구 하나 없이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테베인들에게 잡힐 것이며, 요셉은 어떤 동정심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뿐인가? 아포피스는 위대한 비밀을 영원히 잃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할 것이다. 그들의 실패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비밀은 영원히 사라지고 살해당한 왕의 아들 카모세와 아모세는 곧 세케넨레의 복수를 위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힉소스인들을 이집트로부터 영원히 몰아 낼 전쟁 말이다.

    그렇다면 배반자 제사장은 어찌되었을까? 그는 며칠 뒤 테베 뒤의 사막, 우리가 오늘날 왕들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곳에 숨어 지내다 잡힌다. 신전으로 잡혀온 그는 아포피스와 그의 아시아인 장관 요셉에 의해 꾸며진 전체 계획의 세부사항뿐만 아니라, 그 배반극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설명해야만 했다. 전체 이야기를 듣고 세케넨레의 아들 카모세는 힉소스인들의 사악한 행위에 분개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그 자신이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심히 괴로웠다. 사라진 비밀로 그는 호루스가 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이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 이었다.

    ### 후속 조치와 새로운 의식의 창설

    세케넨레의 살해 이후, 음모자들은 배신의 대가로 처벌받게 되며, 주벨로는 끔찍한 의식 속에서 처형됩니다. 이 장은 세케넨레의 후계자인 카모세가 새로운 의식을 통해 이집트를 다시 부흥시키는 과정을 설명하며 마무리됩니다. 카모세의 부활과 함께 이집트는 신왕국 시대가 시작되며, 다시 영광을 되찾게 됩니다.

    카모세는 살아남은 상급 제사장들의 위원회를 소집한다. 그중 새로운 대제사장이 되기로 된 자가 그 상항에 대한 놀라운 분석과 멋진 해결책을 내 돕는다. 그는 이집트가 신들의 시대인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고 두 왕국의 번성은 오시리스를 그의 형제 세트가 죽인 것을 통해 이루어졌디는 것을 알아냈다. 여신 이시스는 굴하지 않고 오시리스의 절단된 몸을 소생시켜 아들 호루스, 즉 신의 아들을 낳는다. 호루스는 인간으로 자란 신이었고, 엄청난 전투에서 사악한 세트와 싸위 자신은 눈 하나를, 세트는 고환을 잃는다. 이 젊은 신은 전투에서 이긴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과 악의 긴장은 계속되게 된다.
    그 현명한 제사장은 계속 설명해 나간다. 이집트는 이 전투 후 강력해졌지만 두 나라는 서서히 노쇠해간다. 세트 신의 힘은 힉소스인들의 도착으로 증대되는데, 그들은 세트와 독사 신 아포피스를 숭배했다. 처음의 호루스와 세트 간의 전투와 같은 전투가 지상에 있었지만 이번에는 세트가 이겼고 지금의 호루스가 진다. 이 최근의 전투에서 왕(호루스)은 죽기 전에 다시 눈 하나를 잃는다. 해결책은 이시스의 지혜를 기억하고 신이 살해당했다고 해서 굴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떨고 있는 젊은 제사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자가 바로 세트의 현시다. 그는 우리를 도와 악을 무찌르도록 할 것이다.”

    세케넨레의 시신은 아무렇게나 매장된 채 수일이나 있었기에 상태가 나빳지만, 미라 제작자들의 손에 의해 일반적인 방법으로 준비되었다. 벌로서 신 우유에 담가졌던 주벨로는 사막의 열기로 썩은 단백질로 인해 지독한 악취를 풍겨, ‘악한 자’ 의 특별한 각인이 되었다. 세케넨레의 오시리스 의식과 동시에 카모세의 호루스 의식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었는데, 거기에는 하나가 아닌 2개의 관이 있었다. 처음의 사람 형상의 아름다운 관은 문자 그대로 향내가 나는 신, 즉 왕에게 딱 맞았던 반면., 두 번째 것은 소박한 흰색에 어떤 비문도 없었다.
    의식의 순간이 다가오자 악취를 풍기며 반쯤 정신이 나간 주벨로가 벌거벗긴 채로 미라 만드는 자들에게 끌려온다. 그의 손은 옆에 붙여지고. 한번의 능숙한 칼 놀림으로 생식기가 잘려, 이제 막 호루스가 되려고 하는 카모세 자신에 의해 바닥에 던져진다. 흐느끼는 주벨로는 발부터 위쪽으로 미라용 붕대에 싸인다. 봉대가 마침내 주벨로의 머리에 닿았고 방부처리사들이 붕대로 얼굴을 단단히 둘러싸니 몸 전체가 완전히 붕대에 싸였다. 잡고 있던 손들이 그를 놓자마자 주벨로는 머리를 뒤로 젖혀 기도를 확보하려고 했고 입을 크게 벌려 숨을 쉬려고 애쓰다가, 관 뚜껑이 봉인된 뒤 수분 내에 죽고 만다.
    주벨로는 그의 배반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
    현명한 새로운 대제사장은 카모세에게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에 잃어버린 진짜 비밀을 대신할 비밀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옛 방법을 대신하여 새 왕을 비유적인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킬 새로운 의식이 계획되었고, 그를 호루스의 지위로 올릴 새로운 주문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의식은 최초 이집트의 마지막 왕의 죽음과, 새로운 왕과 함께 다시 태어난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했다. 주벨로의 시신은 세케넨레와 함께 죽은 자의 왕국을 여행하며 그 싸움을 지속할 것이다. 즉 고환이 없는 세트(주벨로의 형상을 입은)와 최초의 호루스와 같이 눈이 없는 새로운 오시리스로서 말이다. 현명하게 일을 처리한 제사장들 덕분에 그 전투는 그것이 태초에 멈춘 지점에서 지속될 것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카모세는 왕명, ‘Wadj-kheper-re’ 를 택하면서 손을 들어 아포피스를 가리킨다. 이 이름은 ‘레의 현시로 번영하도다’ 라는 뜻으로, 다른 말로는 ‘너는 실패했지만 나는 왕실의 비밀을 갖고 잘해 나가고 있다!’다.
    카모세가 비유적인 죽음에서 일어났듯, 그의 나라도 그랬다. 우리가 오늘날 신왕국이라고 부르는 시대가 곧 시작되었고, 이집트는 다시 한번 영광을 구가하게 된다.

    ### 핵심 주제와 분석

    이 장은 성서 이야기, 이집트 역사, 프리메이슨 전설의 요소들을 결합하여 프리메이슨의 기원을 고대 이집트의 왕실과 종교적 갈등에 두고 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 분석은 전통적인 역사 해석에 도전하며,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연결을 제안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관점을 제공합니다.

    저자들은 이러한 연결을 통해 프리메이슨 의식의 계보를 고대 이집트의 신비와 연결시키고,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가 이 고대 문명의 정치적, 영적 갈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장의 내러티브는 역사적 참고 자료와 해석으로 가득 차 있으며, 프리메이슨리의 기원에 대한 도발적이지만 추측적인 탐구를 제공합니다.

    이 챕터는 특히 논란의 여지가 많고 추측에 기반한 해석을 제시하며, 성서 이야기와 이집트의 왕실 음모를 연결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 손에 잡히는 증거

    이 챕터는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특히,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라는 파라오와 그에게 가혹한 죽음을 안겨준 사건에 집중합니다. 저자들은 이집트의 미라들 중에서 세케넨레의 미라가 다른 왕들과 비교해 독보적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또 다른 미라는 젊은 제사장의 유골로, 이 시신은 전례 없는 매장 방식과 그 얼굴에 나타난 극도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 젊은 제사장은 거세당한 흔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카이로 박물관에 카탈로그 번호 61023번으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 시신이 히람 아비프의 전설에서 주벨로(Jubelo)로 불리는 젊은 제사장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산 제물이 될 처지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젊은 제사장 주벨로는 지금 카탈로그 번호 61023번을 달고 카이로 박물관에 있다. 카탈로그 번호 61051인 세케넨레 타오와 함께.

    ### 메이슨적 증거

    이야기는 세케넨레 타오의 살해 사건에서 프리메이슨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저자들은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사용되는 특정한 비밀 용어들이 실제로 고대 이집트어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Ma’at-neb-men-aa, Ma’at-ba-aa”라는 구절은 고대 이집트어로 “프리메이슨의 마스터는 위대하도다. 프리메이슨의 정신은 위대하도다”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신전의 완벽하게 올바르고 공명정대한 기초와 같이 균형 잡힌 순수함을 나타내는 진리와 정의, 공정, 조화 그리고 도덕적 청렴’ 등의 복잡한 개넘들에 가까운 현대 단어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마트’ 는 이전에 보았던 대로, 인류가 가지고 있는 3개의 가장 중요한 가치들, 즉 과학의 지식, 예술의 아름다움, 그리고 종교의 영성을 혼합한 삶에의 태도였다. 그것은 바로 메이슨의 자질이다. 다른 번역들은 문자 그대로 직역한 것이다.
    이 단어들이 어떻게 그 광대한 시간 동안 멀쩡히 살아남았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이 말들이 이후의 언어들 즉 가나안어 아람어 불어와 영어 등 으로 번역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이유는 그것들이 그저 상징이 아닌, 입문자를 부활시키는 실제 ‘주문’ 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원래 의미는 아마도 솔로몬 시대 이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장시간에 걸쳐, 전달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부족 의식에 의해 세대에 세대를 걸쳐 정보가 전달된다는 설을 증명했다. 사실, 왜곡 없이 생각을 전달하는 가장 좋은 길이 그들이 맡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라는 것은 널리 동의되고 있는 바다. 이것의 좋은 예가 바로 어린이들의 노래로. 기록되고 시리즈 윤색된 오래된 이야기들보다 더 완벽하게 살아남는다. 예를 들어, 영국 아이들이 여전히 읊고 있는 이니, 미니, 마이니, 모Eenie meenie, minie mo(술래잡기에서 술래를 정할 때에 쓰는 말)는 로마의 영국 점령시대, 심지어 켈트족보다도 더 오래된 것으로, 2천 년내지 3천 년 동안 그대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그만큼 지속될 것이다!
    이 단어들이 수천 년 동안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살아남아 전해져 내려왔다는 점에서, 저자들은 이 용어들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된 주문이라고 결론짓습니다.

    마트에 관한, 화석이 되어버린 이집트 주문은 2개의 오래된 구전과 혜롯 신전 아래에서의 동면 기간을 통해 전해 내려져 왔으며, 그마술적인 힘에 대한 숭배로 그 말의 의미가 사라진 오랜 후에도 주문이 유지될 수있었다.
    한편, 신왕국의 이집트 성직자들과 고관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즉각 메이슨이 떠오른다. 하트셰프수트 여왕의 최고 선지자는 공사 감독자로도 알려졌고, 프타의 최고 선지자는 ‘우두머리 장인’ 또는 ‘우두머리 기술사’였다.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 메이슨단이 설립되고 나서 오랜 후에야 이집트어가 번역될 수 있었으니, 메이슨들이 이 설명을 따라 했을 리는 만무하다.

    연구를 진행해 나갈수록, 더 많은 관련들이 나왔다. 고대 이집트에서 남자는 자신의 직업을 관장하는 신의 신전에서 예배 드렸을 것이고, 건축자들 및 필경사들과 관련되었던 달의 신 토트는 나중에 초기 프리메이슨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이집트 제사장들 또한 오로지 흰옷만을 입으며 많은 시간을 자신들을 깨끗이 하고 정화하는 데에 썼던 점으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자들인 에세네파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성관계를 절제했으며 할례를 받았고 조개를 비롯한 몇몇 음식들을 금기로 삼았다. 세례의 방식은 거의 물을 사용하는 것이었고, 의복을 청결케 하기 위해 향을 사용했다. 에세네파의 의식은 참으로 그역사가 장구한 셈이다

    저자들은 또한 이집트 신화에서 호루스가 그의 아버지 오시리스를 잃고 어머니 이시스가 과부가 된 후에 태어난 이야기와,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히람 아비프를 “미망인의 아들”로 부르는 것을 연결합니다. 이집트에서 호루스는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미망인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카모세(Kamose)와 같은 왕들에게 적합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챕터는 고대 이집트의 왕실과 종교적 갈등을 프리메이슨의 기원과 연결시키며, 성서적 서사와 이집트 역사의 복잡한 연관성을 탐구합니다. 저자들은 프리메이슨의 의식과 전통이 이집트의 고대 비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가 이집트의 정치적·영적 투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장은 역사적 참고 자료와 해석이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독자에게 도전적인 시각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은 주로 추측과 해석에 기반하고 있어, 전통적인 역사 해석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 **두려움을 모르는 세케넨레 타오**
    저자들은 히람 아비프(Hiram Abiff)의 이야기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세케넨레 타오는 이집트 왕으로, 그의 잔인한 죽음은 힉소스(Hyksos)와의 전쟁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세케넨레의 죽음이 전쟁 중에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집트 종교와 왕위 계승에 관한 중요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발생했다고 봅니다.

    **인용문:**
    > “우리는 이제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가 대부분의 메이슨들이 믿는 대로, 역사적인 것이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세케넨레의 죽음은 테베가 힉소스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이집트가 침략자들로부터 자유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카모세와 아모세 왕이 힉소스를 물리치고 이집트를 재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세케넨레의 희생은 이집트 역사에서 선과 악의 싸움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간주됩니다.

    세케넨레의 아들 카모세 왕은 결국 ‘야비한 아시아인들’ 을 쳤고 힉소스는 곧 멤피스에서 축출당한다. 마지막 힉소스 왕인 아포피스의 후계자 아페피 2세의 여인들은, 아마스라는 장군이 이끄는 테베 함대가 힉소스 수도 아바리스의 성벽으로 통하는 파텟쿠 운하를 거슬러 올라오는 광경을 보는 끔직한 경험을 했다. 힉소스인들은 카모세의 젊은 형제이자 후계자인 아모세에 의해 예루살렘까지 쫓겨, 마침내 이집트로부터 완전히 내몰렸다. 바다로 피할 수 없어, 20만 4천이나 되는 가구가 시나이와 네게브 사막을 지나갔다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이 택한 경로는 ‘Wat Hor’, 즉 호루스의 길이었다고 한다.

    ### **오시리스의 비밀**
    세케넨레의 죽음은 이집트의 고대 비밀과 종교 의식의 소실을 의미했으며, 이 사건 이후 이집트 왕실의 절대적인 신성한 권리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저자들은 주장합니다. 이는 결국 이집트 통치자들이 왕이 아니라 “파라오”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단어는 ‘위대한 집’을 의미하는 이집트어 “Per-aa”에서 유래했습니다.

    **인용문:**
    > “개인의 절대적인 신성한 권리는 영원히 사라졌다. 한 왕이 사라진 것만이 아니라, 모든 왕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 **프리메이슨의 기원**
    세케넨레 타오가 건축자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진리와 정의의 원리인 마트(Maat)를 지키는 가장 위대한 보호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 극적인 이야기를 자신들의 역사에 맞게 변형하여 솔로몬 성전의 건축과 연관시키고, 히람 아비프의 이야기를 통해 유대인의 역사를 새롭게 구성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 관해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이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특색없는 새 군주에게 다윗의 왕실이 갖지 못한 왕의 비밀을 주기 위해 사용했을 것이다.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은 그것의 이집트 기원을 바꾸어 자신들 나라의 역사 속 위대한 순간이 되게 했다. 솔로몬 왕 성전의 건축 말이다. 하지만 솔로몬의 이야기가 너무 잘 알려져 있었기에 유대 이야기의 영웅은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차선책의 역할을 꾸며냈는데, 그것이 바로 위대한 성전의 건축자였던 것.

    또한, 히람 아비프가 야훼가 아닌, 태양신 레(Ra)를 숭배했으며, 프리메이슨이 정오에 모임을 여는 이유는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반복적으로 암송되는 문구와 연결되며, 프리메이슨 의식과 고대 이집트 종교 사이의 깊은 연관성을 강조합니다.

    **인용문:**
    > “프리메이슨의 태양은 항상 그 절정에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으로서 메이슨이 일컫는 신은 그러므로 최고점에 있는 태양신, 정오에 천체의 정점이 되는 레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조직으로 자리 잡은 프리메이슨은 ‘프리메이슨의 태양은 항상 그 절정에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여 언제나 상징적으로 정오에 모임을 연다. ‘지극히 높으신 분’ 으로서 메이슨이 일컫는 신은 그러므로 최고점에 있는 태양신, 정오에 천체의 정점이 되는 레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게다가 성서가 이스라엘인들이 야훼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전에 ‘우리 선조들의 신’이 ‘엘 엘리온el elion’, 즉 ‘신-지극히 높으신 자’ 에 대한 가나안의 표현으로 언급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원본 이집트 이야기와 그것을 가져다 쓴 이스라엘인들 간의 연관성을 강화시켜준다.

    ### **결론**
    분명히 세케넨레 타오의 고귀한 죽음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의 부활과 이집트 왕실의 진정한 비밀들이 영원히 사라진 순간을 이루었다. 미래의 파라오들과 그들의 가까운 충신들을 위한 통과의례를 위해 대체 비밀이 만들어졌지만, 원래의 비밀이 고취했던 절대적인 통치권은 전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의식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유대인들의 역사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용문:**
    > “히람 아비프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된 뒤에야 우리는, 메이슨 의식에서 사용되는 두 마디의 귀엣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들은 이집트와 유대교의 연계가 모세로부터 시작되며, 이집트와 유대 역사의 상호작용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고 결론짓습니다.

    히람 아비프의 진실과 세케넨레와의 관련성을 알게 된 우리는 지금, 성전 기사단들이 찾으려 했던 정보를 묻어둘 수 있었던 유일한 집단과 거의 1천500년의 간극을 두고 마주하고 있다. 따라서 에세네파의 번성기까지 유대교의 발전상을 추적해야만 하며, 이집트와의 연계는 모세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다음 과제는 어떻게 원시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살해된 이집트 왕의 신화가 유대인들의 새 국가의 역사 속 사건으로 변형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 이제 유대 민족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신화의 정황을 풀어야만 한다. 바로, 선지자 모세.


    Chapter 9: 유대교의 탄생

    이 장에서는 이집트 신왕국과 예수 시대를 연결 지어주는 프리메이슨 의식의 존재를 탐구하고 있으며, 구약 성서를 주요 정보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책의 주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모세의 역사적 배경을 분석하며,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이 장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모세와 그의 탄생

    모세의 역사적 배경

    • 모세의 역할:** 모세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 즉 하비루를 이끌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약 성서는 그가 율법을 가져온 인물로 묘사합니다. 이는 구약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모세가 이집트에서 유대 민족을 구출한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 이집트 신왕국과 하비루:** 이집트의 힉소스 왕조의 몰락 후, 하비루라는 집단이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처우와 강제 노동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시나이 산 근처의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강요당했습니다.

    다행히 성서는 유대 국가가 한 남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모세라는 이름의 인물이 존재했고, 그가 노예였던 아시아인들의 이집트로부터의 탈출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힉소스의 추방 후에 하비루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셈족들은 평판이 좋지 못한것 이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는 다정했던 이집트인들이 왜 갑자기 기원전 1560년에서 1550년 사이 10년 동안 그 나라에 남아 있던 자들 모두를 노예로 삼았는지를 설명해준다. 또, 기원전 16, 15세기의 비문들은 이 하비루 노예들과 그들의 강제 노동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중 하나는 환기도 되지 않고 불꽃이 산소를 소진해버리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열악한 터키의 옥 광산에 얼마나 많은 수가 강제로 투입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광산들이 시나이 반도의 남쪽 산지에 있는 야훼의 산, 즉 시나이 산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곳이라는 점이다.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하비루 노예들의 탈출이 이집트 영토가 아니라 여기에서 벌어졌던 것은 아닌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 원시 유대인들은 비록 가나안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집트 신들을 숭배했으며, 오시리스와 프타, 하토르 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는 선조들의 신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인도되기를 열망하는 고귀한 노예 신분의 야훼 추종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하고는 맞지 않는다.
    모든 유대인들과 기독교 어린이들에게 되풀이되어 전해지는 모세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지금까지 가장 일반적인 의견은 모세가 람세스의 통치 기간에 이집트로부터 ‘그의 민족’을 인도해내었다는 것으로, 이는 기원전 1290년에서 1224년 사이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훌륭한 증거는 휠씬 이전 시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힉소스 왕조의 몰락과 아주 근접한 시기다. 하지만 연대 측정의 문제를 더 파고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모세라고 부르는 인물에 대해 무엇을 알며, 성서는 이스라엘인들과 그들의 새로운 신에 관해 무어라고 말하는지 보도록 하자.

    모세의 이름과 탄생 설화

    • 모세의 이름:** 모세라는 이름이 이집트어로 ‘물에서 구해낸’이라는 뜻이라는 주장과, ‘나일 강에서 태어난’이라는 뜻을 가진 ‘하피모세스(Hapymoses)’라는 이집트어 원형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소개됩니다. 이는 모세의 이름이 이집트 신들의 이름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모세, 즉 모세스 Moses라는 이름 자체가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로마 가톨릭 듀아이 성서는 그것이 실제로는 그저 ‘~로부터 태어난’ 임에도 불구하고 ‘물에서 구해낸’ 이라는 뜻의 이집트어라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모세스라는 이름에는 그 앞에 붙는 다른 이름이 있게 마련이었는데, 토트모세스(Thothmoses: 토트에서 태어난)와 람세스(Rameses: 라에서 태어난), 또는 아멘모시스(Amenmosis: 아멘에서 태어난)와 같이 말이다. ‘moses’ 라는 요소가 영어로 표현될 때에는 약간 달리 철자 된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하고 모세 자신이나 나중의 필경사가 그의 이름 앞에 있는 이집트 신의 이름을 뺏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커 보였다.
    로마 가톨릭의 정의는 아마 잘못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모세의 전체 이름이 ‘나일 강에서 태어난’이 될 것으로, 그 경우에는 다음과 같이 쓰이는 하피모세스Hapymoses로 불렸을 것이다.

    히브리어로 ‘Moshe’, 아랍어로는 ‘Musa’ 의 형태인 이름, 모세는 특이하게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매우 드문 고대 이집트 단어다. 이집트인들은 아직도 시나이 산을 ‘Jubal Musa’, 즉 모세의 산으로 부른다.

    – **탄생 설화의 유사성:** 모세의 탄생 설화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르곤 1세와 유사합니다. 사르곤의 탄생 설화와 모세의 설화는 모두 ‘물에서 구해진’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이는 고대 창조 신화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사르곤:
    나의 못생긴 어머니가 나를 잉태했다. 그녀가 나를 몰래 낳았다.
    그녀는 골풀로 만든 바구니에 나를 담았다.
    그녀는 역청으로 바구니 덮개를 봉했다.
    그녀는 나를 강에 던졌는데 물이 나를 덮치지 않았다.

    모세:
    레위 여인… 잉태하고 아들을 낳았다…3개월 동안 그를 숨겼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골풀 바구니를 만들었다.
    진흙과 타르로 물이 새지 않도록 하고 그를 그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나일 강 둑 옆의 갈대 사이에 두었다.

    우리는 그 탄생 설화가 유대 국가의 탄생을 꾸미기 위해, 물에서 비롯된 고대의 창조 주제를 모방하여 기원전 6세기에 창조된 허구가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그것은 이집트 군대의 장군이자 이집트 왕족의 일원이 어떻게 유대 민족의 창시자가 되었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길이기도 했다. 이 부분은 곧 다루게 될 것이다.
    분명히 그 이야기의 일부는 나중에 창안된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모세의 어머니를 레위 여인으로 묘사한 것인데, 이는 역사를 짜 맞추고자 하는 시도였다. 레위족은 제사장 종족이 되었고, 그래서 필경사들은 자신들 시대의 논리를 사용하여 모세가 제사장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레위족이라는 추론을 했던 것. <출애굽기>에는 그 책이 이집트 역사의 구전 형식들울 모아놓았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 주인공이 모세인지 아니면 아론인지 분명치 않으며, 심지어는 모세가 야훼를 만난 산의 이름도 시나이 산인지 호렙 산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 그것들이다.

    우리는 구약성서가 구약성서의 초기 저자들이 먼 과거로부터 내려온 부족의 전설들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상기해야 했다. 가상의 사건들은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역사적인 세부사항들은 전혀 없었기에, 다른 저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세계관과 울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따라 다른 방법들로 공백을 메웠다.

    유대 민족의 기원과 이집트와의 관계

    • 이집트 왕족과의 연결:**
      만일 <출애굽기>가 어떤 파라오의 딸이 아기 모세를 발견했는지 말해주었다면 일이 휠씬 쉬워졌겠지만, 분명 저자들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가 이집트 왕족의 일원일 가능성은 세 가지로 설명되며,
      1. 그는 아시아계나 하비루 사람으로 구약성서가 말한 대로 아기나 어린아이였을 때에 왕실로 들어가게 된다. 이집트인들은 이웃 국가들의 어린이들을 맡아 돌보았기에,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이집트인들에 대해 자신의 민족에게 유리하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힉소스 왕조 시대와 그토록 가까운 시대에 하비루가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2. 그는 고귀한 출신의 이집트인으로, 살인혐의로 도망쳤고 하비루를 그의 반역 추종자들로 삼았다.
      3. 그는 마지막 힉소스 왕 군대의 젊은 셈족 장관으로, 테베 군주국이 다시 통치권을 쥐자 나머지 아시아족 무리와 함께 이집트에서 추방되어 광야로 내몰린다. 그랬다가 나중에 하비루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이것은 모세 이야기의 연대를 지금껏 여겨왔던 것보다 훨씬 이전으로 두는 것이지만, 그렇게 될 수 없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 모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 군대의 장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지니 말이다.
    • 모세의 교육과 지식:** 사도행전 7:22에 따르면 모세는 이집트의 학문과 기술을 익혔으며, 모세는 힉소스 사기꾼이 아닌 진정한 파라오와 관련되어 있어야만 했다. 이집트의 비밀과 왕 즉위의 비밀을 배웠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며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합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이처럼 후세에 모세에 관해 쓴 이스라엘인들은 선조들의 원수와 그가 가까웠다고 조작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며, 그가 위대한 비밀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다. 그 모든 비밀 말이다. 모세가 이집트 왕족에 관여되었을 때쯤에는 신왕국은 설립되어 있었을 것이고, ‘대체 비밀’ 은 오시리스의 ‘원본’ 비밀의 자리를 차지했었을 것이다. 파라오 궁정의 고위 일원으로서 모세는 사라진 진정한 비밀들을 대체한, 세케넨레 타오와 그의 용감한 희생의 전설을 둘러싸고 설명되는 부활의 원리를 배웠음에 틀림없다. 어린 모세에게 이 의식은 왕 즉위의 비밀, 권력의 최고 표현, 왕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그에게 가르쳤다. 그에게 이것은 매우 인상 깊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언제나 지니고 다녔던 그 이야기가 마침내 이스라엘의 새 땅에서 왕 즉위를 위한 새로운 통과의례가 되었으니 말이다.

    유대교의 탄생과 성서의 기록

    • 구약 성서의 내용:** 구약 성서가 기록한 유대 민족의 탄생 이야기는 기원전 6세기에 창조된 허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의 세부사항이 역사적 진실과 혼합되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소수정예에게만 알려졌던 ‘사라진 왕’ 의 이야기는 별로 변하지 않고 다윗 왕의 혈통을 타고 전해졌다. 반면 출애굽의 세부사항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더 낮은 등급의 이야기였으며, 진실과 가상이 뒤섞여 본체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 십계명의 중요성:** 모세는 이집트에서 십계명을 받아 새로운 국가의 기초 법과 질서를 정립해야 했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은 당시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기록된 것으로, 이는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 경로로 이집트를 탈출했던 간에, 출애굽에 관한 성서의 이야기는 모세가 이끈 집단이 고도로 이집트화되었고 이집트 신들에 대한 숭배가 일상적인 의식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돌판 위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은 모세는 새로운 나라의 건립을 표시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에 처하게 된다. 모든 왕들은 자신이 지도자로서 적합한 인물이며, 새로운 사회에 기초적인 법과 질서가 있다는 증거로서 신들로부터 ‘신임장’을 받아야만 했던 것.
    모세는 다른 글은 이해할 수 없었으니, 이 서판들은 이집트 상형문자로만 기록될 수 있었다. 매일매일 기록된 언어에 의존하는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기원전 2000년에 돌 위에 새겨진 표시로부터 메시지가 드러난다는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당시 돌판에서 신의 메시지를 읽는 자들은 위대한 마법사들로 여겨졌다. 이집트인들이 상형문자를 ‘신의 말씀’ 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 장에서는 유대교의 기원과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을 다룹니다. 특히 모세와 그의 신 야훼,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약속된 땅에 대한 승리를 통해 고대 이집트와 유대교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출애굽기>를 찬찬히 읽어가던 우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의 무서움을 느꼈다. 기독교 중심의 교육을 받은 우리의 생각은 이내 뒤바뀌었다. 자유를 얻어내고 ‘약속된 땅’ 을 찾는 고귀하고 위대한 민족 대신, 원시의 귀신신앙과 배반, 대량 살인, 강간, 야만행위와 절도의 불온한 일람표를 읽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가히 새로운 국가의 기원에 대한 가장 추악한 진술이었다.

    **1. 시나이산맥의 전쟁의 신**

    책은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이야기와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제공합니다. 출애굽기의 묘사에 따르면, 모세는 이집트인의 폭력에 맞서 살인을 저지르고, 그 후 쫓기는 신세가 된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쳐 시나이를 향해 동으로 도망간다. 거기에서 그는 미디안 사람들(그니스인들로도 불리는)의 도움을 받고 왕의 딸 십보라와 결혼한다.
    이곳에서 그는 미디안 족속의 신, 이마에 있는 십자가처럼 생긴 문양을 상징으로 하는 폭풍우와 전쟁의 신, 즉 후에 야훼로 알려질 신과의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이 신과 대화한 뒤에 유대인의 신을 위한 영감과 중심 주제를 얻는다.
    이 신은 자신을 숭배하지 않으면 후손까지 복수하겠다고 위협하며, 신의 처소를 위해 특정 제물과 재료를 요구합니다. 이 신의 상징인 ‘케루빔’은 이집트의 전통 디자인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됩니다.

    성서에 따르면, 모세는 결국 이집트로 돌아가 이집트인들이 하비루라고 부르던 여러 아시아족들 무리를 노예에서 풀어준다. 이는 아마도 그의 새로운 폭풍의 지니/신의 힘을 이용하여 불행한 이집트인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가져다줌으로써 가능했었을 것이다. 우리는 60만의 이스라엘인들이 45년 동안 광야를 유랑했다고 들었지만, 사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탈출할 수는 없다는 것이 식자들의 의견이다. 또, 이집트 역사에는 그런 사건에 관한 어떠한 흔적도 없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정도의 탈출 인원이었다면 이집트 전체 인구의 4분의 1정도였을 것이고, 그런 이동이 가졌을 식량과 노동력 공급에서의 파급효과를 보았을 때에, 분명히 기록이 있어야만 마땅하다.

    하여간 그 수가 어느 정도였든, 모세는 그의 민족을 이끌고 시나이로 들어가 미디안에서 야영하며 그의 장인 이드로를 맞이한다. 그 후 선지자 모세는 신성한 산으로 아직도 거기 살고 있는 신을 만나러 다시 올라간다. 빽빽한 구름 속에 살던 폭풍의 신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인들이나 그들의 동물 중 아무라도 발을 산에 대거나 닿기만 해도 돌에 맞거나 살에 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 새로운 신은 아울러 자신의 새로운 추종자들에게 자신을 숭배할 것을 명하며, 그렇지 않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후손까지 복수당할 것이라고 위협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금이나 은, 황동, 고운 아마포, 오소리 가죽과 싯팀목(아카시아)을 제물로 가져올 것을 요구하고, 자신을 위한 금으로 덮은 처소를 짓도록 한다. 이 처소는 꼭대기에 소위 ‘케루빔’ 이라고 하는 것 2개가 있는 전통적인 이집트 디자인이었다. 이 케루빔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한 쌍의 날개 달린 스핑크스, 즉 인간 머리에 날개 달린 사자들로 여겨진다.

    **인용문:** “그 새로운 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었나 보다. 모세가 야훼와 이야기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자마자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신 아피스의 형상을 닮은 우상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으며, 이에 새로운 신은 대로한다. 그는 모세에게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 ‘죄인들’을 가능한 한 많이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에 따라 3천 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2. 성벽이 무너지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가나안의 원주민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상세히 묘사하며, 가나안의 도시와 민족들을 전멸시키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 아이들, 동물들까지 포함된 대량 학살이 이루어집니다.

    ‘그러자 시혼이 우리를 대항하려고 나왔으니 그와 그의 모든 백성이 야하스에서 싸웠느니라.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그를 넘기시니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으며 그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취하고 각 성읍에서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 것들을 완전히 멸하여 아무도 남겨 놓지 않았으나 오직 가축과 우리가 취한 성읍들의 전리품은 우리를 위한 탈취물로 가졌느니라. 아르논 강가에 있는 아르엘과 강 옆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나아가 길르앗에 이르기까지 우리보다 더 강한 성읍은 하나도 없었으니, 주 우리 하나님께서 모두 우리에게 넘겨주셨느니라. 오직 암몬 자손의 땅에는 네가 이르지 못하였으니, 즉 압복 강의 일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또 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지하신 곳들이라…
    …그후 우리가 돌이켜 바산으로 가는 길로 올라가자 바산 왕 옥이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더불어 우리를 대적하여 에드레이에서 싸우려고 나왔느니라.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를 두려워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헤스본에 거했던 아모리인들의 왕 시혼에게 했던 것처럼 그에게 행할지니라.” 하셨느니라. 그리하여 주 우리 하나님께서 바산 왕 옥과 그의 모든 백성도 우리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그에게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그를 쳤느니라. 그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빼앗았는데 우리가 그들로부터 빼앗지 아니한 성읍이 하나도 없었으니, 모두 바산에 있는 옥의 왕국 아르곱 지방에 있는 육십 개의 성읍이라. 이들 모든 성읍은 높은 성벽과 문들과 빗장들로 둘려 있고 그 외에도 성벽이 없는 고을들이 매우 많았느니라. 우리가 그들을 완전히 멸하였으니 마치 우리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했던 것처럼 각 성읍의 남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완전히 멸하였으나 모든 가축과 성읍들에서 얻은 전리품은 우리를 위한 탈취물로 가졌으며….’

    이 구절들에서 그리고 있는 씨움은 모든 남자와 여자, 아이들뿐만 아니라 양, 소. 나귀들을 칼로 쳐 죽이는 학살에 다름 아니다.

    **인용문:** “구약성서에는 이와 같은 폭력적인 형태의 구절들이 더 있다. 게다가 야훼는 그의 백성에게 자신이 가장 강력할 뿐 아니라, 자신을 숭배하며 그 율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흉포하게 응징할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신명기> 8: 19-20의 경고 말씀이다.
    ‘만일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르며 그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경배하면 내가 오늘 너에 대하여 증거하노니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리라. 주께서 너희 면전에서 멸하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그렇게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라.’

    실제로 모세가 누구였든 간에, 그는 이집트에서 살인자가 되었고 여생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 보냈다. 이방인들이건, 그를 믿었던 사람들이건 말이다. 우리는 이 남자 및 그의 신에 대한 견해와 오늘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이 불일치는 신에 대한 관념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신들과 서로 얽히고 섞이면서 성장해가며, 그 시대의 도덕과 필요를 반영하는 이상화된 대표인물로 서서히 진화해 나가는 사회의 중심축임을 보여준다. 신이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인간이 계속해서 인간의 형상 안에서 신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다.

    **3. 출애굽의 시기**

    현대 학자들 중 일부는 출애굽기의 승리들이 과장된 것이라 보고, 이스라엘 민족이 유혈의 탈취보다는 서서히 가나안 사회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많은 파괴된 성읍들과 도시들을 보여주며, 출애굽의 시기가 중기 청동기 시대 후기와 일치함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모세가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신과 민족을 이끌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은 힉소스의 추방과 기원전 15세기 중반 사이의 100년 내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모세가 테베인들이 다시 그 나라의 통치권을 쥔 바로 직후 이집트 왕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개연성은 크게 증가된다.

    **인용문:** “모세가 자신의 신을 만들고 큰 고난 속에서도 새로운 국가를 세울 통찰력과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에서 받았던 교육 덕분이었을 것이다. 언약의 궤의 디자인에서부터 야훼가 모세에게 준 상형문자판에 이르기까지 출애굽 사건에 이집트의 강한 영향이 있었다는 증거는 많이 있다.”…모세는 확실히 그의 백성을 어리석은 영혼들로 취급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 즉 우리가 알고 있듯 이집트의 모든 비밀들에 능통한 자와 비교할 때에 너무나도 무지했음이 틀림없다.

    이 장에서는 초기 유대교의 탄생 과정에서의 폭력과 대량 학살,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관계에 대한 논란을 제기하며, 고대 이집트와의 연결고리를 강조합니다. 모세의 역할과 이집트에서의 교육이 그의 지도력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스라엘의 사사시대는 여러 부족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시기를 말하며, 이 사사들은 원래 판단력 있고 공정한 인물들이 아니라 지방 영웅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지파)은 모두 출애굽에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그 중 오직 두세 지파만이 출애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시기에 시므온과 레위 지파는 사실상 전멸하였고, 유다 지파만이 중요한 이스라엘 지파로 인정되었다.

    하비루라는 유목 민족이 이스라엘의 히브리 국가를 형성하며 농업과 제조업에 종사하기 시작하고, 침략 당시 살아 남았던 가나안 사람들은 융화되어 수천 년의 농경생활로부터 발전시킨 자신들의 기술을 하비루에게 전수하였다. 구약 최초의 작품인 ‘데보라의 노래’는 블레셋 사람들과 같은 공공의 적에 맞서 부족들 간에 협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투에 병사를 제공하지 않았던 부족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사사들은 왕과 달리 각각의 판결은 한두 부족에게 국한된 힘을 가졌으며, 각기 자발적인 충성을 동반하는 정치적, 경제적 지도력은 부족했다. 간단히 말해, 왕들은 신이 정해준 자들이었지만 사사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사들이 동등하지는 않았다. 최초의 침략 시대 초기의 영웅들 중 하나는 나중에 이름을 기드온으로 바꾼 전사 여룹바알이었다(이 이름은 확실히 바알 신을 기리는 가나안식이었는데, 이는 그 당시 야훼가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우리가 믿기를 원하는 만큼 확고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왕위 제의를 받았으나 야훼가 왕이라고 하며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그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모세의 후계자로 여겨져야만 한다. 그의 권위는 모세로부터 직접 나왔고 다른 사사들을 확실히 능가하는 것이었다.
    기드온은 오브라(성읍)에 종교 센터를 설립하고 궤 형식의 에포드(숭배 대상)를 만들었으며, 이는 그가 다른 신을 숭배했음을 시사한다.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남자로서 기드온은 대규모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고(사로잡힌 미디안 처녀들도 포함되었을 것 이다), 70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소문이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사사의 지위를 물려받아 왕이 되었다. 그의 신전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이는 그가 모세 시대의 의식을 전수받았음을 시사한다.
    바알 베리트를 위한 그의 신전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믹달’ 즉 약 5미터 두께의 벽으로 둘러싸인 신전 요새였다. 각 출입구 양쪽에서는 신성한 기둥들이 세워졌었던 기초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모세가 죽은 이후의 세대였고, 중요한 것은 솔로몬 성전보다 수백 년 전이었다는 점이다. 기둥의 의미가 주고 있는 가르침과 그것들에 관련되었을 의식은 오직 모세로부터 기드온을 통해 아비멜렉으로 전해질 수 있었다.
    아비멜렉에게는 불행하게도, 안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미숙한 군주정은 세워진 직후 무너졌고, 그는 도시 데베스의 저항하는 무리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 후에도 사사시대는 지속되었고, 대신 왕실의 비밀과 왕 즉위식에 대한 지식은 기드온의 사사들 혈통 속에 살아남는다.

    이 기간 내내 예루살렘이 에부스족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고,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 중심은 북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실로였다. 실로는 기원전 1050년경에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파괴되었으며, 이 사건을 중요한 사사이자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을 즉위시키는 자였던 사무엘이 목격한다.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족 간의 전쟁은 성서 속 삼손의 이야기로 기록된다. 이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나실인(거룩한 자)이 맨손으로 오른쪽과 왼쪽 기둥을 무너뜨려 3천 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사건은, 그들의 국가적 안정을 깨는 은유였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사무엘은 베냐민 부족의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었지만, 그가 어떻게 이 즉위 방식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물론, 그 의식 자체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없다. 사무엘과 사울 간의 관계는, 안정을 위해 연합한 성공적인 집단의 두 기둥인 제사장과 왕의 쌍두 권력 관계로 보인다. 이 관계는 사율이 사무엘 대신 길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또한 사울이 패배한 아말렉의 여인들까지 모두 진멸하라는 사무엘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사무엘이 그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사울과의 갈등이 발생한다.

    이에 새로운 왕 후보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족이 아니라 주요 지파인 유다 부족으로부터였다. 바로 베들레햄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온 다윗이었다.
    다윗은 어느 모로 보나 위대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조신으로, 병사와 정치인으로서 말이다. 골리앗을 죽인 유명한 이야기는 사실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 거구의 가드인을 죽인 것은 사실 다윗이 아니었다. 야레오르김의 아들 베들레헴 사람 엘하난이란 다른 인물이었다.
    그 사건을 다윗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은, 다윗을 전장에 가보지 않은 그저 일개 양치기 소년으로 그리고자 하는 후대의 시도였다.
    다윗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했던 사울은 종국에 자신이 목숨을 잃었고, 사무엘은 두 번째 왕을 세운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할 때에, 그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블레셋의 군대에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혈통의 설립자에게 이는 떳떳치 못한 경력일 테니 말이다.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부족들을 단일 민족으로 통합시켰다. 이집트 왕의 역할과 놀라운 유사점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또한 한 명의 통치자에 의해 연합된 두 나라, 즉 남북 왕국이었던 것이다. 처음 7년 동안 다윗은 유다부족의 남왕국에 있는 헤브론에서 통치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왕으로서 연합왕국의 두 반쪽 사이에 위치한 새로운 수도로 예루살렘을 택한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궁을 짓고, 언약의 궤를 보관하던 장막과 제단은 그가 야훼를 위해 짓도록 한 성전 자리로 옮긴다.

    다윗은 대부분 외국의 용병들로 구성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어, 아직도 그 지역에 도시를 이루고 있는 블레셋 족속을 무찌른다. 그 뒤 결국에는 유프라테스에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영토를 통치하게 된다. 다윗이 티레의 왕 히람과 평화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였지만, 다윗과 그 가족의 방종은 이내 불안정을 가져온다.
    다윗은 밧세바에 반해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아들 암논은 이복 남매 다말을 강간한 뒤 형제 압살롬에게 살해당하고, 압살롬은 아버지로부터 무력으로 왕국을 빼앗으려 한다. 다윗 군과 압살롬 군의 싸움에서 디윗은 자신의 왕국을 지켜냈고, 아들 압살롬은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을 잃는다.
    이 모든 사건들로 다윗은 계획했던 자신의 신 야훼를 모실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임종 침상에 눕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 대신 왕위 계승자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즉위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빗세바에게서 난 솔로몬이라는 다른 아들이 다윗의 도움으로 대제사장 사독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솔로몬의 의식이 열렸고, 그 후 오래지 않아 새 왕은 자신의 형제와 그 심복들을 반역 예방 차원에서 모두 없애버린다.

    솔로몬은 위대한 왕이 되었고, 파라오의 딸과 결혼한 솔로몬은 결혼 지참금으로 이집트 국경에 있는 전략적 도시 게제르를 받아, 영토 전역에서 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야훼의 집,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거룩한 성전을 지었다는 점이다.
    이미 논의한 바 있듯, 그 성전 건축은 비교적 작은 사업이었지만, 중앙에 자리 잡아 화려하게 꾸며졌다.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그 성전의 출입구는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동쪽으로 나 있으며, 위치가 두 왕국의 경계선상에 있었기에 출입구의 기둥들은 하나는 북쪽에, 하나는 남쪽에 서서 통일 왕국의 조화와 균형을 표현했다. 이것은 통일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얻고자 했던 이집트 개념의 재현이었던 것이다.

    솔로몬은 그의 아들로, 이집트 왕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성전을 건축하였으며, 성전의 기둥은 정치적 통합을 상징한다. 남쪽의 기둥은 유다를, 북쪽의 기둥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두 기둥은 정치적 안정과 통합을 상징한다.
    또, 야훼의 상인방으로 결합되었을 때에 둘은 ‘안정’ 을 만들어낸다. 고대 이집트에서처럼 두 왕국이 적절한 기둥으로 연합되는 한, 정치적 안정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이집트의 개념에서 전부 빌려다 쓴 것으로, 이스라엘 군주정치와 종교 구조가 여전히 그 고대 기원을 잃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모든 건축에는 비용이 들었고, 사실상 사용된 전문적 기술은 모두 외국의 것이었다. 티레의 왕 히람이 숙련된 노동력과 대부분의 원자재를 제공했다. 이는 아직 시작하는 왕국으로서는 엄청난 비용이었고, 그 결과 솔로몬의 자금은 바닥나기 시작한다. 솔로몬은 많은 도시들을 팔아 쌓여가는 빚을 갚았다. 백성들은 강제 노역을 감내해야 했다. 만 명의 사람들이 매달 돌아가며 티레의 왕 히람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보내졌다. 왕국은 12개의 지역으로 나뉘었고, 각 지역은 매년 한 달치의 세금을 왕궁에 바칠 의무가 있었다. 점점 과해지는 세금 속에서 솔로몬의 백성들은 위대한 왕에 대한 열의를 잃기 시작한다.

    성서 후기 저자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지게, 야훼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너무 빈약했다. 그 나라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다른 신들이 적어도 동등하게 여겨졌었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많은 자들에게 야훼는 이스라엘의 전쟁의 신 이상은 아니었다. 전쟁기에는 유용했지만, 신들의 전체 만신전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유명한 이스라엘 인물들에게 세대에 걸쳐 부여된 이름들은 바알에 대한 강한 경외심을 보여준다. 심지어 가장 열성적인 야훼 숭배자조차도 이 시대의 유대인들이 오로지 한 신만을 믿었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솔로몬 또한 마찬가지였다. 치세 말로 갈수록 솔로몬은 다른 신들의 단독 숭배에 몰두했다. 이는 많은 집단들, 특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제사장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솔로몬의 이 죄는 그 아비 다윗을 생각해서 야훼가 벌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나중에 합리화된다. 간단히 말해, 모세 시대부터 솔로몬까지 야훼는 그의 ‘선민’들에게 그다지 사랑을 받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는 지혜롭기로 유명한 왕, 솔로몬이 죽자 나라는 사실상 파산할 뿐 아니라 무신無神의 지대가 된다.

    왕권에 대한 믿음 속에서 키워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화난 북왕국 백성들에게 회유 정책을 쓰라는 충고 속에서도, 계속 협력을 요구한다. 그 결과 두 왕국의 통일은 이내 깨어져버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문젯거리로 보였던 유다와 더 이상 관련이 없어지게된다.
    결국 솔로몬의 사후에 왕국은 두 왕국으로 분열되며,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분리된다.

    결론적으로, 유대교의 탄생과 성전 건축은 이집트의 영향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와 원리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모세의 전통과 이집트의 비밀은 이후 이스라엘 왕실에서 계속 전해지며, 이로써 유대교의 기초와 이스라엘의 역사적 배경이 형성되었다.

    이 기간의 이스라엘인들에 관해 배운 것을 종합해보자. 주요 문명이 되고자 했던 신생 국가의 열망은 미완성된 종교와 강제 노역, 그리고 빌린 돈에 기초했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모든 사업들에서처럼 그것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미래 세대의 마음과 정신 속에 새겨진다. 그 결과 그들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종교를 완성하고, 자신들의 등장을 신과 운명을 함께한 민족으로서 규정하면서 무상한 영광을 재건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부활을 통한 입문식과 성전 건축 원리에 기초한 도덕적 청렴의 비밀들은 왕실 속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된 이집트 이야기로부터 취한 추상적인 개념이 더 이상 아니었다. 실제였던 것이다. 언약의 궤와 그들의 하나님을 모신 예루살렘 성전이 실제였던 만큼.

    **인용문 요약:**
    1.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지파)이 모두 출애굽에 관련되었다고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그중 오직 두세 부족만이 그런 식으로 도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사사들의 역할은 왕과 달라, 각각의 판결은 한두 부족에게 국한된 힘을 가졌고 자발적인 충성을 동반하는 정치, 경제적 지도력은 거의 갖지 못했다.”
    3.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왕위 제의를 받았지만 야훼가 왕이라고 하며 거절한다.”
    4.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때 최초로 부족들이 단일민족으로 진정한 의미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5. “솔로몬은 위대한 왕이 되었고, 그의 통치하에 이스라엘은 전무후무한 번성을 누렸다.”

    결론
    모세의 탄생 설화는 수메르 신화에 기초한 것으로 판명이 났고, 나아가 이집트 고위 장관이자 왕실 일원이 어떻게 유대 국가의 설립자가 되었는지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것이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는 모세가 세케넨레 타오의 대체 비밀들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두 기둥 이야기에도 익숙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는 이 비밀들을 사용하여 추종자들을 위한 새로운 왕 즉위 의식을 만들었다. 이는 나라도 없고 문화도 없던 유대인들에게 정체성과 다윗 혈통을 따라 전해지는 비밀 의식을 주게 된다.
    원래의 ‘야훼 표시’ 로 알려진 타우(영어로 T자)를 가진 겐족의 난폭한 폭풍의 신 야훼를 받아들인 것은 모세였다. 새로운 신을 만난 뒤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가 살인죄로 쫓기는 몸으로 하비루 민족을 인도해내게 된다. 유대인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은 끊임없는 토착민 살육의 과정으로 성서에서 그려지고 있다
    야훼의 종교가 일단 자리 잡자, 야훼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리고 전투로 유명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필두로 하는 일련의 사사들에 의해 인도된다. 다른 많은 사사들이 그를 따랐지만 성서나 고고학적 증거는 두 기둥의 상징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과 나실인 삼손에 의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것이 모세의 이집트 비밀이 계속적으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을 유대인 최초의 왕으로 기름 부었지만 결국에는 다윗이 그 뒤를 잇는다. 다윗은 기원전 1000년경에 통치했던 가장 성공적이었던 왕으로서,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을 통일하여 두 왕국 사이에 위치한 예루살렘에 새 수도를 정한다. 그 후 예루살렘에 최초의 성전을 지은 자는 그의 아들 솔로몬으로, 이 성전에는 동쪽으로 난 출입구를 이루는 2개의 기둥이 있어 두 왕국의 통일을 나타내게 된다. 즉 북쪽의 기둥은 이스라엘을, 남쪽의 것은 유다를 의미한다. 성전으로 가는 출입구에 서 있는 이 두 기둥은 이스라엘 군주정부가 아직도 이집트 뿌리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솔로몬은 자신의 나라를 사실상 파산시킨 채 죽는다. 하지만 산 상태에서의 부활을 통한 입문식과 건축 원리에 기초한 도덕적 청렴의 비밀을 남겨 왕실에서 전해 내려지도록 한다.


    Chapter 10: 고난으로 물든 천년

    바빌론 유수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붕괴되었지만, 남왕국 유다는 15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597년 3월,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유다의 왕 여호아긴을 추방한 후 시드기아를 허수아비 왕으로 세운다. 성경은 다양한 숫자를 언급하지만, 약 3천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바빌론(바빌로니아의 수도)으로 끌려갔다고 전해진다. 포로들에게 줄 기름과 곡물 배급의 지급 목록을 보여주고 있는, 바빌론에서 발견된 설형 문자판에는 왕 여호아긴과 그의 다섯 아들들이 수납자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아긴이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실은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느부갓네살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시드기아는 처음에는 바빌론에 협조했지만, 이후 바빌론의 적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결국 7월에 도시는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시드기아는 바빌로니아의 리블라에 있는 느부갓네살 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후, 눈이 뽑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예레미아> 52: 29에 의하면 832명이 같은 시기에 추방되었다고 한다.

    **바빌론에서의 삶**
    바빌론은 유다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에게 경이로운 도시였음에 틀림없다. 이 거대한 도시는 유프라테스 강의 양둑을 연결한 사각형 형태로, 그 크기는 가로 세로 15마일(24km)에 달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곧게 뻗은 길들과 3층, 심지어 4층 높이의 건물들이 격자를 이루고 있다는 기록으로 그 거대한 규모를 묘사하고 있다. 그 성벽들은 너무 넓어서 네 필의 말이 끄는 전차로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에서의 삶은 이전과 달랐지만, 유대인들은 곧 그들 자신의 이집트/가나안에 기초한 신화들과 바빌로니아 신화가 공통의 고대 수메르 근원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창조 신화와 홍수 신화 사이의 간극이 이제야 메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이 시기의 유대인들은 유일신만을 섬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비록 그들이 야훼를 자신들 나라의 특별한 신으로 섬겼다 하더라도, 새 집으로 강제 이주되자마자 바빌로니아의 신들을 섬겼을 것이다. 아울러 모든 신들은 관할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기에, 방문한 지역의 신이나 신들에게 조심 차원에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일이었다. 야훼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역은 예루살렘이었고, 모든 증거로 볼 때에, 심지어 야훼의 가장 강력한 추종자들조차 포로생활 전 기간 동안 야훼를 위한 사당을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의 변형

    추방된 유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지만, 솔로몬 성전의 철학적이며 근본주의적이었던 제사장들은 오직 ‘완고하게 하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영감받은 자들’ 로서, 가능한 한 그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성서의 첫 다섯 책의 내용 대부분이 이때, 즉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에 쓰였었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포로로 삼은 자들의 정보를 가져다가 태초에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방식을 재구성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홍수와 같은 이후의 사건들에 관한 세부사항도 얻을 수 있었다.
    이 최초의 유대인들의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의 단편, 와전된 문화적 기억, 부족 신화들이 접붙여진 혼합물이었다. 따라서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현대 학자들은 진실과 허구를 구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 저자 스타일과 영향까지도 분석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수메르와 이집트의 영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이라는 인물은 이집트 영향 이전에 존재했음이 확실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을 쓴 저자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지 오랜 뒤의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
    <창세기> 28:18에는 야곱이 예루살렘에서 10마일 정도 북쪽에 있는 벧엘에 땅과 하늘을 잇는 기둥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창세기> 31: 45는 그가 아마도 요단강 서편의 갈르엣 산에 있는 미스바에 두 번째 기둥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둥은 모세가 상하 이집트 두 왕국으로부터 가지고 나왔던 신학을 연상시킨다. 여기 등장한 두 성읍들 중 하나도 야곱의 시대에 존재했던 것 같지는 않고, 그 이름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볼 때에 자신들의 이야기에 필요해서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 벧엘은 ‘신의 집’을 의미하며 하늘과 땅의 접촉지점을 나타낸다. 그리고 ‘망루’ 를 의미하는 미스바는 침략으로부터의 방호 지점이다.

    이름의 의미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을 추상적인 호칭으로 여기며, 아기를 가졌을 때에 부모는 작명서적에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를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전반을 볼 때에 이름은 그저 호칭이 아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 셈어 언어학자 존 알레그로는 ‘야곱’이라는 이름이 ‘기둥’ 또는 좀 더 문자적으로 ‘서 있는 돌’을 의미하는 수메르어 IA-A-GUB에서 직접 유래했음을 밝혀냈다.

    현대의 독자들은 그저 개인의 이름으로만 볼 뿐이지만 히브리인들은 역사를 기록할 때에 특별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주요 인물들에게 호칭을 부여했다. 따리서 <창세기>의 저자들은 이 인물을 ‘야곱’이라 부름으로서 많은 것을 전해주었고, 성서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꿀 때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부여된다. 즉 이는 새로운 왕국의 기둥들이 제자리에 서고 나라가 그 자신의 이름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알리는 신호였을 것이다. 이는 진정한 왕국 설립에 필요한 선결조건이었던 것.

    에스겔이라는 예언자의 신비롭고 깊이 있는 인물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과 저술은 수 세기 동안 학자들과 신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특히 쿰란 공동체의 신학, 즉 흔히 에세네파로 알려진 이들과 후대 종교 전통, 특히 프리메이슨에 미친 에스겔의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룹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의 예언자

    이 장은 바빌로니아 유수 시기에 에제키엘이 맡은 중요한 역할을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수심에 차고 반복적이며 종종 어렵기조차 한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남자가 완전히 미쳤다고 결론짓게 했다. 그가 존재했든 아니든, 그가 제정신이든 아니면 완전히 정신분열증 환자였든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왜나하면 그의 것으로 여겨지는 기록들은 진실 여부를 떠나, 예루살렘 교회였던 사람들인 쿰란인들의 신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야훼를 위한 상상의, 또는 이상화된 성전의 건축자였고 그것이 매우 중요했다고 제안합니다.

    20세기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에스겔의 저술이 약 기원전 230년 이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이는 기원전 187년에서 서기 70년경의 것으로 여겨지는, 쿰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해사본’ 의 연대와 가깝다.
    우리의 논제와 무관하게, 이 기록들과 쿰란 공동체 사이에 이미 밝혀진 많은 관련성들만을 볼 때에 우리는 편의상 <에스겔서>가 바빌론 유수 기간 동안 포로로 잡혀 있던 한 남자에 의해 쓰인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예루살렘의 몰락과 성전의 파괴는, 성전의 제사장이자 기원전 597년에 추방된 엘리트 중의 하나였던 에스겔에게는 엄청난 일이었다.

    이 장에서는 에스겔이 기원전 597년에 추방된 엘리트 중 한 명으로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날에 일어난 그의 아내의 죽음을 중심으로 한 심오한 환상을 가졌다고 가정합니다. 에스겔에게 이러한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특히 이집트 우상 숭배의 역사에 대한 야훼의 벌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야훼에 대한 부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적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도록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야훼가 자신이 선택한 민족을 위해 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두 왕국)은 반역적이며 뻔뻔하고 냉담한 태도로 자신들의 거룩한 소명과 언약 관계를 망각했다. 유대인들은 신성한 율법에 불순종하고, 거룩한 것들을 더럽혔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성전 그 자체를 포함해서 말이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는 죽음을 나타냈으며, 반면 새 도시와 재건된 성전은 죄의 흔적이 제거된 부활이 될 것이었다.

    에스겔은 자신을 언약을 완성하며 아주 순결하고 선한 나라의 중심이 될 새 성전의 건축자로 여겼으며, 이 성전은 지상에 세워질 “하늘의 왕국”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의 환상은 모호한 알레고리와 인간, 사자, 독수리, 황소의 얼굴을 가진 생물들과 같은 기이한 비유와 이상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그는 하늘을 날아 성전에 가고 자신의 머리와 수염을 깎아 그것을 저울로 달아 똑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는 등의 이상한 의식을 치른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 3분의 1이 불태워지고 다른 3분의 1은 칼로 토막 내어지며 마지막 3분의 1은 바람에 흩어버려진다. 이때 인간의 머리카락은 그들의 위엄과 힘, 권력을 의미했고, 이 이미지는 유다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의 표시였음에 틀림없다.

    기원전 591년의 에스겔 환상

    에스겔의 가장 흥미로운 환상 중 하나는 기원전 591년 11월에 일어났으며, 이때 그는 불과 빛으로 덮인 인물에 의해 성전의 내문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유다의 장로들이 비밀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 장은 이 환상과 현대의 프리메이슨 의식 사이의 유사성을 그려내며, 이 장로들이 이집트에서 유래한 비밀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고 암시합니다.

    기원전 591년 11월 에스겔은 특히 흥미롭고도 중요한 환상을 본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도시 니푸르에 있는 거대한 수로 근처의 집에 앉아 있고, 그를 방문한 유다의 장로들이 앞에 앉아 있었다. 불과 광채로 옷 입은 남자가 손을 내밀어 혼수상태에 빠진 선지자 에스겔의 앞머리를 잡아 성전의 안쪽 대문으로 데리고 갈 때에, 장로들(아마 전 왕도 포함된)은 야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듣게 된다. 안뜰의 문에 이른 에스겔의 명령대로 담에 구멍을 뚫자 나온 문으로 탐무스나 바알, 아도니스 신에 대한 우상 숭배의 영상과 함께 놀라운 광경이 보인다.
    ‘그것을 통해서 그는 “기어가는 것들”의 그림과 이집트에서 나온 혼합주의 의식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신화적 장면들 및 모티브들이 포함된 벽화를 본다. 70명의 장로들이 향로를 흔들며 비밀 의식에 참여한다.’

    굵은 글씨는 우리가 표시한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장로들(무아지경에 이른 에스겔 앞에 앉아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 이집트에 기원을 둔 ‘비밀’들을 가지고 있었고, 솔로몬 성전에서 사적인 의식들을 행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스겔서> 8: 12는 그 의식이 어둠 속에서 행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 메이슨 제3등급 의식과 마찬가지로.

    에스겔 환상의 해석

    저자들은 에스겔의 환상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비난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것은 또한 예루살렘 성전 의식 내에서 고대 이집트의 신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이 해석은 이 책의 초기 논의에서 이스라엘 종교에 이집트 요소가 통합되었다는 주제와 연결됩니다. 이는 에스겔이 강력히 반대한 주제입니다.

    에스겔 8장 8절의 환상 서문은 창세기 49장 6절과 비교되며, 두 구절 모두 파라오 세켄엔레 타오로부터 비밀을 얻지 못한 실패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겔이 성전 벽 안에서 이집트 이미지를 발견한 것은 그를 격분하게 했으며, 그는 이것을 성전을 개조하고 이러한 외국 영향을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는 요시야 왕과 연관시켰습니다.

    그 선지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이 환상은 성서학자들에게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가 야훼와의 순수한 관계가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는 일반적이고 명백한 메시지 외에는 별 의미를 주지 못한다. 게다가 이집트적 요소는 한번도 설명된 적이 없다. 이 특별한 환상을 소개하는 구절(<에스겔서> 8:8)은 어떻게 그 선지자가 그 과정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으며, <창세기> 49:6과 크게 유사하다. 일찍이 우리는 그 <창세기> 말씀이 세케넨레의 비밀을 얻으려는 요셉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과, 악한들이 ‘벽을 파 내려갔도다’ 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밝힌 바 있다. 말씀을 기억해보자.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비밀에 들어오지 말며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내 명예야, 너는 그들과 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완고함으로 벽을 파 내려갔도다.’

    <에스겔서>의 말씀은 세케넨레 타오로부터 왕 즉위의 비밀을 얻고자 한 시도의 실패를 둘러싼 정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때 그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지금 그 담을 파라.” 하시기에 내가 그 담을 팠더니, 보라, 문이 있더라.’

    <창세기>에서는 원본 비밀을 얻어내는 데에 실패하는 반면, 에스겔의 환상에서 그는 문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았다. 하지만 이때에는 원본 비밀이 있는 테베의 성전에서가 아니라 대체 비밀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였다. 에스겔은 벽에 있는 이집트 이미지들을 보고는 주범을 요시아 왕으로 여기고 격노한다. 그가 바로 이전 세기 중반에 성전을 수리하고 벽을 재단장한 자였으니 말이다. 이 설명은 솔로몬 왕 성전에 기초한 현대 메이슨 성전의 벽과 천장에서 발견되는 상징과 매우 유사하게 들린다. 그리고 오늘날에조차 대부분 문양은 확실히 이집트적이다.

    저자들은 에스겔의 이러한 강력한 반대가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이것이 세켄엔레 이야기가 솔로몬의 성전 건축가 히람의 이야기로 변형된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에스겔의 이집트 요소가 제거된 새로운 성전에 대한 환상은 후에 쿰란 종파에 영향을 미친 개혁된 종교 공동체의 청사진이 되었습니다.

    니푸르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에스겔은 자신의 인도를 받기 위해 자신의 집에 모인 유다 왕국의 전 지도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에스겔을 읽고 또 읽으며 이 모호한 글이 지금 얼마나 많은 의미를 주는지 믿을 수 없었다. 우리가 세케넨레를 쿰란 공동체와 이으며 사건들의 연결고리를 재구성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고리를 발견했음이 확실해질 수록 우리의 홍분은 솟구쳐 올랐다. 선지자가 추방된 장로들에게 전하던 메시지는 바로 모세로부터 다윗에 이르는 혈통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그들 자신의 비밀 의식에 관한 것이었던 것이다! 선지자가 전했던 메시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우리는 야훼를 믿지 않고 다른 신들을 승배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의 왕국을 잃었도다. 그리고 그대들은 우리 선조의 하나님을 위한 본분을 잊고, 태양 숭배에 기초한 이교도 이집트로부터 온 “비밀 의식”을 행했기에 가장 큰 죄를 범하였도다. 그대들은 그들 중 가장 큰 죄인으로, 야훼가 그대들을 벌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는 이 풀 죽은 남자들의 반응을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세 자신이 다윗의 왕실에 준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그대들에게 더 이상 왕실이 없는 것이다. 야훼가 하늘의 왕이심을 기억하라.’
    에스겔이 대답한다.
    ‘선지자여, 우리가 해야 할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소서.’
    ‘그대들은 우선 마음의 성전을 지은 뒤 돌로 된 성전을 지으라. 율법에 따라 살며 야훼만을 숭배하라. 그대들의 비밀은 지킬 수 있지만 이집트 이야기를 버리고 그 안의 위대한 진리를 성전 재건 임무로 향하게 하라. 그대들의 비밀을 알라. 하지만 우선 하나님을 먼저 알라.’

    에스겔의 이 중요한 환상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하며 간단한 설명이 또 있을까? 우리는 세케넨레의 이야기가 히람, 즉 최초 성전 건축자의 이야기로 바뀐 때가 바로 유대 민족 역사상 이 시점이었다고 믿는다. 물론 그 성전은 가능한 한 많은 이집트 의식의 흔적들을 없애기 위해 다시 만들도록 강요한 에스겔에 의해 사라져버렸지만.
    <에스겔서>는 계속해서 그가 어떻게 막대기 2개를 택해 ‘유다’ 와 ‘요셉’ 이라는 이름을 쓰고 그것들을 하나로 합쳐, 상징적으로 두 왕국의 재통일을 나타내도록 다른 환상에서 명을 받았는지 보여주고 있다. 한 왕이 그들을 다스릴 것이고 야훼는 이스라엘을 배교(다른 신과의 ‘관계’ 속에 다시 빠지는 것)로부터 구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모든 부정으로부터 정화시키고 새로운 계약 관계로 이스라엘을 데려올 것이다. 하나님의 종 다윗의 통치하에 이스라엘은 순종과 신앙 속에 살 것이며 선조들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새 시대의 모든 축복과 은혜와 같이 평화의 계약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훼는 그의 민족 가운데에 머물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 그의 지성소가 있는 것은 그 약속이 새로워졌으며, 그러므로 열방이 야훼가 그의 민족을 정화시켜 구별해놓으셨다는 것을 볼 것이라는 표시다.

    재건된 성전의 환상

    에스겔의 가장 유명한 환상은 기원전 573년경에 발생한 것으로, 새로운 성전에 대한 상세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환상에서 에스겔은 청동색 남성에 의해 웅장한 구조물을 보여주며, 여기에는 측정치, 문, 뜰 등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다양한 요소들이 나열됩니다.

    가장 유명한 에스겔의 환상은 그가 거의 25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 뒤인 기원전 573년 초에 일어난 것으로, 이즈음 그의 세계관은 특히 세련되어져 있었다. 이 환상에서 높은 산에 옮겨진 그는 앞에 펼쳐진, 마치 성읍처럼 벽과 문을 가진 건물들의 파노라마를 본다. 처음에 동쪽 문에 서 있던 그는 손에 10피트 4인치(약 3미터) 길이의 측량대를 든, 모양이 놋 같은 남자를 만나는데, 이는 건축적인 가르침이다. 에스겔은 그 모든 내용을 세심하게 익혀 망명자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성전으로 가는 주 통로에 있는 ‘의義의 문’으로 알려진 동쪽 문을 본다. 주요 성전 부분은 높은 곳에 위치하여 성소를 불경한 곳으로부터 구분해준다. 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입구에 닿고 그 다음 문의 통로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서로 마주하고 있는 3개의 초소가 있으며, 이는 모두 정사각형이고 같은 면적이다.

    이 환상은 프리메이슨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으며, 특히 동문, 정사각형 형태, 성전 입구로 이어지는 일곱 계단에 대한 강조는 프리메이슨 의식과 일치합니다. 에스겔의 성전에 대한 환상은 단순한 종교적 환상이 아니라 새로운 계약 공동체를 위한 지침서였으며, 이는 후에 쿰란의 에세네파에 의해 채택되었습니다.

    이 환상의 흔적은 프리메이슨단에 매우 확실히 남아 있다. 동문을 중요시하며 사각을 존중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입구에 이르는 일곱 계단이다. 제3등급 의식의 입문자는 메이슨 성전의 동쪽에 있는 마스터의 대좌까지 일곱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통로를 지나면 두 번째 입구와 안뜰로 이끄는 연결 복도가 나온다. 바깥 뜰의 벽을 따라 들어가면 커다란 포장된 길이 나 있고, 통틀어 30개의 방이 마주하고 있다. 성전의 다양한 부분들은 점점 올라가면서 거룩함의 등급이 표현된다. 부분 부분의 설명은 계속되고 3개의 문을 동, 서, 남쪽이라 밝히는데, 이는 메이슨 전통에서와 똑같다. 마침내 에스겔은 안뜰로 인도되어 거기에서 북쪽과 남쪽 문 옆의 두 방을 본다. 전자는 성전 경내를 관장하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며 후자는 제단을 담당하는 자들을 위한 것. 뜰은 완벽한 정사각형이다. 성전의 현관홀은 안뜰보다 열 계단 높고 그곳의 기둥은 솔로몬 성전의 기둥인 보아스와 야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환상은 야훼가 돌아오는 데에서 정점에 이르는데, 고대 이집트 왕 호루스와 같이 그도 동편의 별처럼 일어나 ‘의의 문’ 을 통해 새 집으로 들어간다.

    쿰란 공동체에 대한 에스겔의 영향

    마지막으로, 이 장은 에스겔의 환상이 쿰란 공동체의 새로운 법으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논의합니다. 제사장에 대한 요구 사항—사독의 후손, 흰색 아마포를 입고, 뜰에 들어가기 전에 포도주를 금하고,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은 에스겔의 환상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되었습니다. 이러한 법과 의식은 쿰란 공동체의 생활 방식의 기초를 형성하였으며, 에스겔의 예언적 환상이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종국에 에스겔의 환상은 성직자들을 위한 율법으로 재탄생하여 쿰란 에세네파의 지침이 된다. 지성소의 적법한 제사장들은 예전의 대제사장 사독의 아들들이 되어야 하는데, 쿰란 사람들에게 사독계Zadokites로 알려진 사독의 이 아들들은 안뜰로 들어갈 때에 흰 아마포 옷을 입었다. 또, 그들은 머리카락을 너무 짧게도 너무 길게도 할 수 없었고 안뜰에 들어가기 전에 포도주를 마셔도 안 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처녀와만 결혼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차이를 가르쳐야만 했다. 요구조건은 계속되는데, 개인 소유를 가질 수 없으며 죽은 자와 접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포함된다.
    새로운 율법을 위한 형판이 만들어졌고 ‘성전은 이래야 한다’ 는 이미지가 사라진 성전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에스겔을 깊고 복잡한 환상을 통해 쿰란 공동체의 신학뿐만 아니라 프리메이슨을 포함한 종교 전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예언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에스겔의 이집트 영향에 대한 반대와 새로운, 정화된 성전에 대한 환상이 후대의 유대교 및 기독교 공동체와 프리메이슨 전통의 정체성에 중심이 되었다고 제안합니다.

    스룹바벨의 성전

    기원전 539년 10월 12일,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키루스)의 장군 구바루는 피를 흘리지 않고 바빌론을 탈환합니다. 17일 후, 고레스 자신이 전차를 타고 이시타르 문에 도착했고, 그 뒤를 페르시아와 메디아인의 연합 군대가 따랐습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이 성전에서 빼앗아갔던 보물도 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다시 얻게 되지만, 이로 인해 유다는 바빌로니아 제국 대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예루살렘을 떠났던 사람들이 이제는 늙은 남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태어난 도시의 기억은 흐릿했을 것이고, 바빌로니아에서의 생활 후에 마주한 예루살렘의 현실은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쪽에서 온 수천 명의 낯선 사람들이 음식과 거처를 요구하고, 옛 가족의 토지와 집을 되찾으려는 상황은 이들에게 낯설고 불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포로 생활 동안 발전된 아이디어들을 가진 이 영리한 사람들은 곧 새로운 야훼와의 강력한 계약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성전은 기원전 6세기 말, 마지막 왕의 손자이자 다윗 왕의 후계자인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바빌론 유수가 유대인들에게 끼친 중요한 영향은 그들의 지도자인 스룹바벨의 이름에서 드러납니다. 그의 이름은 ‘바빌론의 씨앗’이라는 뜻입니다. 새 성전이 하나하나 쌓아 올려지면서 제사장뿐만 아니라 일반 남자들에게도 적용될 ‘거룩함’을 위한 새롭고도 엄격한 요구 사항이 제정되었습니다. 여기서 ‘남자들’이라는 단어가 신중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는 여성이 제사장이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두 번째 성전을 기반으로 한 새 종교의 여러 분야에 관여할 수는 있었지만, 성직에는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귀환한 망명자들이 시행한 율법은 야훼의 민족에게 명확한 규율을 요구했습니다. 특히 식이 율법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의 목록이 길게 주어졌고, 부정한 동물의 목록은 다음을 포함했습니다: 낙타, 오소리, 게, 가재, 조개, 상어, 뱀, 박쥐, 벌레 떼, 쥐, 도마뱀, 산토끼, 타조 그리고 돼지. 저녁 식사로 먹을 수 있는 동물은 양, 염소, 비둘기 같은 일반적인 것부터, 귀뚜라미, 메뚜기, 방아깨비 같은 덜 매력적인 작은 곤충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망명 생활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일신론자도 아니었고, 모세의 신인 야훼의 열렬한 추종자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유대인(Jew)’이라는 용어 자체가 바빌로니아 유수 동안 만들어졌으며, 그 후 스룹바벨의 성전 건설로 인해 특징지어진 민족으로서의 새로운 강력한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축자들은 자신들을 야훼와의 관계 속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민족으로 여겼으며, 그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타지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때 흩어져 있던 레반트(히브리, 가나안, 페니키아를 포함하는 중동의 한 지역)의 부족들이 한 민족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야훼에 대한 새로운 위협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인의 도움으로 바빌로니아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기원전 4세기 중반에 등장한 그리스 문화는 유대주의에 더욱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인들은 만신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민족의 신들에도 관심을 가지는 사해 동포주의적인 절충주의자들이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수메르와 이집트, 바빌론과 그밖의 곳 으로부터 온 신앙들에 기원을 둔 신학을 세웠으나, 지금은 자신들의 특별한 신, 야훼에게만 마음을 모으기를 원한다. 비록 그리스인들 또한 다른 영향력에 대해 미신적인 두려움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새로운 생각들에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들의 역할을 구분하며, 자신들의 운명이 과학과 정치, 경제, 군사적 힘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성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을 섬기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철학자와 과학자, 시인들을 배출하며 헬레니즘 세계를 확장시켰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으로, 그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전 제국을 정복한 뒤, 아프가니스탄을 건너 인도의 아대륙에 이르렀다. 그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었을 때에 그는 아직 서른세 살밖에 안 된 청년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그가 창조한 제국은 진정한 국제적 삶의 방식을 열어주었고, 이집트의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인더스 계곡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으로 지식과 물품이 교환되었다. 그리스어는 상업, 외교, 학문의 표준어가 되었으며, 헬레니즘적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은 지식인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 되었다. 만일 그리스어로 읽고 쓰지 못한다면 새로운 국제적인 엘리트 집단에 끼지 못했던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헬레니즘

    이집트 사회는 그리스인들이 도착하자 스물네 살의 알렉산더를 신의 아들이자 파라오의 화신으로 천명하며 맞이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에서 ‘Haa-ib-re Setep-en-amen레가 기뻐하고 아멘이 택한 자’라는 뜻의 왕명을 지어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인정받았다. 알렉산더는 이집트에 잠깐 머물렀지만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고대 신전들을 복구했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도시가 지어졌다. 이집트에서의 헬레니즘의 영향은 비록 전통적인 이집트 왕실의 장식을 사용했지만 그리스인들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알려진 파라오 혈통에 남아 있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혜롭기로도 명성이 자자했던 클레오파트라로, 확실히 그녀는 이집트어까지 사용할 수 있었던 이 왕조의 몇 안 되는 지도자들 중의 하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고대 이집트 신들과 그리스 신들이 혼합되어 새로운 혼합 신들이 등장했다. 두 왕국의 쌍둥이 기둥은 헤르메스 기둥이 되었고 고대 이집트 달의 신 토트의 특성들은 헤르메스에게로 흡수되었다. 지혜를 의미했던 토트가 마트의 형제였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신은 모든 비밀 지식을 3만 6천535권의 두루마리에 담아, 인류를 위해 사용할 가치 있는 자들만이 지식들을 알 수 있도록 하늘 아래에 숨긴 것으로 알려진다(두루마리의 숫자가 거의 정확히 한 세기의 날의 숫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헤르메스는 글쓰기와 건축, 산수, 측량, 기하학, 천문학, 의학과 수술의 창안자로서의 토트의 역할을 인계받는다.

    한편, 토트와 헤르메스 모두 프리메이슨 전설에서 너무나도 중요할 뿐 아니라, 같은 인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시만디아스의 무덤에는 2만 권의 두루마리가 묻혀 있었다….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주제들 또한 중요했기에 그 모두가 토트나 헤르메스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는 충신의 애국심과 신의 지혜를 자신의 성격 속에 융화시켜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J.펠로우즈A.M.(J. Fellows A. M.): <프리메이슨의 미스터리 The Mysteries of Freemasonry

    프리메이슨과 토트/헤르메스의 역할

    프리메이슨의 고대의 훈령은 이니고 존스(16. 17세기를 살다 간 영국의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의 글에서 인용된 다음 글과 같이 헤르메스/토트가 과학의 초기 발전에 관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과학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묻는 너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러하다. 흔히 노아의 홍수로 불리는 대홍수 전에 라멕이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창세기> 4장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두 아내, 아다와 실라가 있었다. 아다에게서 그는 두 아들 야발과 유발을 낳고, 실라에게서는 두발가인이라는 아들 하나와 나아마라는 딸을 낳았고, 이 네 자녀들이 세상의 모든 기술의 시작을 발견했다. 야발은 기하학을 발견하고 양 떼를 나누었으며 최초로 석재와 목재로 된 집을 지었다.
    그의 형제 유발은 음악을 발견했으며, 하프와 오르간을 만드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두발가인은 동과 철로 된 모든 것을 만드는 자들의 선생이었고 딸은 직조술을 발견했다.
    신이 불이나 물로 죄를 벌하시리라는 것을 잘 알았던 이 자녀들은 자신들의 과학들을 두 기둥 위에 적었다.
    기둥 중 하나는 대리석이라 불로 타지 않을 것이고, 다른 것은 벽돌로 되어 물에 잠기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너에게 이 돌들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 위에 과학들이 적혀 발견되었는지 진실을 담아 말하도록 하겠다
    2076년 니누스의 치하에 살았던 왕이기도 제사장과 철학자이기도 한 위대한 혜르메스(트리스메기스투스라는 별명을 가진)가 (이집트에서) 그것들 중 하나를 발견했다. 노아의 손자였던 구스의 손자로 여겨지기도 하는 그는 최초로 천문학을 배웠다. 다른 여러 자연의 신비를 동경했던 그는 만물의 창조자인 유일신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하루를 12시간으로 나누었으며, 황도대를 12궁으로 나눈 자로 여겨진다. 또, 그는 이집트 왕 오시리스의 장관으로서, 일상적인 글쓰기와 이집트 최초의 관습인 상형문자를 창안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과학들을 탐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다(Anno Mundi. MDCCCX(천지창조 이래 1810년))’
    이니고 존스 문서The Inigo Jones Document, 1607년

    여기에서 프리메이슨은 어떻게 처음 그리스인들이 이집트 신화로부터 자신들의 신앙을 구축했는지 상기하고 있다. 연대 표시 ‘Anno Mundi’ 는 세상이 시작된 이후부터를 의미하는데, 이는 프리메이슨이 기원전 4000년, 즉 수메르 문명이 갑자기 나타난 때로 여기고 있는 때다!(흥미롭게도 인용문에 주어진 날짜는 토트/헤르메스가 기원전 3390년에 쓰기를 발명했고 과학을 인류에게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것은 고대 이집트 최초의 통일 왕국이 서고, 최초로 알려진 상형문자가 만들어진 때보다 200년도 넘게 앞선 시기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새로운 도전

    기원전 4세기, 유대인들의 신학은 성숙하여 치밀한 신화를 갖추었고, 성직자들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거부했다. 하지만 많은 백성들은 야훼와의 약속에 있어서 제한적인 측면들을 금세 망각하고 재빨리 이 새로운 세계주의적인 세계 질서에 적응했다. 그 결과, 곧 자신들을 유대인으로 부르는 새로운 민족이 퍼져 나가며 모든 헬레니즘 도시에 유대인 지구가 만들어진다. 자신들의 문화가 아직 미숙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건축이나 제조술에 관한 아무런 유산도 없었다. 대신 거친 환경을 통해 살아남는 법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것을 얻어내는 법을 배웠다. 이렇듯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는 타고난 자질과 의지가 그들을 훌륭한 장사꾼으로 만들어, 이익을 누리며 성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유대인들은 이내 그리스 제국을 운영하는 새로운 상권의 존경받는 일원이 된다. 한 주석자에 따르면, 그런 그들은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정신 속까지도 그리스인’ 이었다.

    야훼 신앙을 지녔던 유대인들의 거룩한 책은 그 당시 도시에 기반을 둔 전통 그리스어 형식인 코이네(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에 사용된 표준 그리스말로, 신약성서가 이것으로 기록되었음.)로 번역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70인역 성서’ 로 알려지게 된 것들이다. 이제 초기 성서는 히브리어, 페르시아 제국의 아람어 그리고 코이네로 기록되어 읽히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세 언어 중의 하나로 지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언어는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창의적이고 특별한 의사소통 방법으로서 한 주어진 시대에 공동체 내에서 작용한다. 반면 번역은 부정확한 것이다. 그리스어는 웅변술과 철학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이상적이고 자유로운 사상가이자 국제적인 사람들이 발전시킨 언어였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히브리어는 아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성이 아닌 영감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와 에베소 및 다른 도시들의 코이네를 쓰는 유대인들은 좋은 의도로 성서를 번역했지만, 그 의미와 느낌을 제대로 살려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유대교는 점차 그리스 문화와 융합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은 너무도 컸다.
    유다 밖의 유대인 거주지는 디아스포라로 알려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신실한 소수에게 그들의 생활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들을 ‘쉬운 것만 좇는 자들’ 로 부르게 되었는데,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쉬운 삶’ 정도였으리라. 그들은 유대의 유산을 원했지만 그리스식의 생활이 주는 편안함을 추구했으며, 율법을 자신들에게 맞게 해석했다. 하지만 최악의 것은, 그들이 행한 시나고그의 날조였다.

    시나고그와 유대교의 변화

    ‘시나고그Synagogue’ 는 전혀 히브리어가 아니다. 그것은 ‘만남의 장소’ 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로서, 원래 유대인들이 모여 다양한 율법들, 특히 음식 율법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에서 필요한 것들을 조직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나고그는 회합 장소에서 회당으로 바뀌어 사실상 야훼를 예배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처소에서만 숭배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모욕적인 생각이었다. 거룩한 도시로 돌아온 하나님의 독실한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커가는 태만에 놀라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리기 시작한다. 경건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야훼가 그들을 잔악하게 벌하실 것이라는.

    한편, 야훼의 종교의 마술적인 특성들에 매료된 신비주의자들은 그 의미를 매우 다른 식으로 받아들였다. 수점數占의 요소들이 그들의 주의를 끌었고, 심지어 신의 히브리 이름조차도 발음은 야훼로 되었지만 쓸 때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JHVH로 적었다. 그리스인들은 이 이름을 ‘야훼의 4자음 문자’로 부르며 유대 문서들을 고대의 비밀 지혜의 원천으로 여겼다. 이렇듯 야훼의 성서에 기반을 두긴 했지만, 그들 자신은 유대인이 아닌 새로운 숭배들이 헬레니즘 제국에 생겨났다. 원하는 것을 유대교로부터 취했던 이 이방인들은, 앞으로 살퍼보겠지만, 기독교라 불리는 후기 그리스 신비 숭배를 위한 밑거름이 된다.

    결론

    이 챕터는 솔로몬 성전의 상징적 의미와 유대 역사의 신화적 요소들을 탐구하며, 특히 이집트의 영향과 세케넨레 의식의 지속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과 이집트 상징의 연관성

    솔로몬이 야훼를 위해 지었던 성전에는 고대 이집트 군주들의 불후의 힘을 상징하는 두 기둥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상징은 여호수아, 기드온, 아비멜렉, 삼손을 통해 모세의 출애굽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집트의 세케넨레 의식, 즉 왕 즉위식의 대중적인 측면들이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전해졌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다윗 왕조의 지속성에 기여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다윗 왕조의 지속성

    솔로몬의 죽음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이 정치적 혼란을 겪는 동안, 남왕국 유다의 다윗 혈통은 400년 이상 유지되었습니다. 저자들은 이 안정성을 세케넨레 의식의 부활과 연결시킵니다. 이 의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묘사된, 빛이 어둠과 혼돈을 물리치는 전쟁의 재현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이는 이집트의 하마 의식을 연상시킵니다.

    바빌론 유수와 세케넨레 의식의 소멸

    세케넨레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이유는 바빌론 유수 기간의 연구를 통해 설명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추방된 장로들에게 솔로몬 성전의 어둠 속에서 행해지던 비밀스런 이집트 의식을 폐지하라고 경고합니다. 이 과정에서 세케넨레의 부활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테베 왕의 살해에 대해 성서가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 49:6의 초기 구절과의 유사성에 놀랐다. <에스겔서>는 계속해서 어떻게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집트 의식들을 없애도록 하고 야훼의 길로 다시 들어가게 했는지 말해준다. 저자들은 이집트 의식의 제거가 히람 아비프, 사라진 왕의 신화로 변형되었고, 이 신화가 하나님이 자신의 성전을 적으로부터 지키지 못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 에스겔이라는 몽상가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요약 및 결론

    이 챕터는 유대교의 역사와 상징이 이집트 문화와 깊이 얽혀 있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솔로몬 성전과 다윗 왕조의 지속성을 설명합니다. 또한, 바빌론 유수 동안 유대교 내부에서 발생한 신화적 변형과 이집트 의식의 소멸 과정을 탐구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프리메이슨리와 고대 이집트, 그리고 기독교의 역사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입니다.

  • 히람의 열쇠와 프리메이슨 – 정리1

    “The Hiram Key: Pharaohs, Freemasonry, and the Discovery of the Secret Scrolls of Jesus”는 프리메이슨리, 고대 이집트, 기독교 역사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주장을 담은 책입니다.
    저자인 로버트 로마스(Robert Lomas)와 크리스토퍼 나이트(Christopher Knight)는 이 책에서 프리메이슨리의 기원을 추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스러운 측면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재해석하며, 기존 역사와 종교적 관념에 도전하는 내용 주장하고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이 책은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역사적, 종교적 탐구를 위한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서문

    서문에서는 저자들이 프리메이슨리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현재 정규 로지 내에 거의 500만 명이나 되는 남성 회원들을 거느린 세계에서 가장 큰 조직, 프리메이슨단의 기원을 찾기 위한 사적 인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프리메이슨리의 중심 인물인 히람 아비프(Hiram Abiff)의 이야기를 탐구하면서, 이 인물이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존 인물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저자들은 히람 아비프의 존재가 서구 역사와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하며, 고대 이집트의 왕 즉위식과 부활 의식이 현대 프리메이슨 의식의 기원이라고 밝혀냅니다.

    저자들은 서구 사회가 고대의 비밀스러운 철학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이 철학이 지난 3천 년 동안 중요한 순간마다 부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의 비밀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서양 역사와 종교에 대한 기존 이해에 도전하는 내용을 예고합니다.

    Chapter 1_프리메이슨의 사라진 비밀

    결사단의 정체

    Chapter 1의 첫 번째 부분인 “결사단의 정체”에서는 프리메이슨 단체의 역사와 대중의 인식에 대한 논의가 전개됩니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의혹
    프리메이슨은 19세기부터 대중의 의혹과 추측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이러한 의혹은 21세기에도 여전합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에는 프리메이슨이 상위 중산층과 귀족 계급의 특권적인 조직으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대중은 프리메이슨을 불신하며 혐오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프리메이슨 단체가 다양한 계층의 남성들에게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엘리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사회적 역할과 내부의 모호성
    프리메이슨 단원들에게는 이 조직이 주로 사회적 모임이자 전통적인 의식의 반복으로 인식됩니다. 의식은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지만, 그 상징적 의미나 역사는 단원들조차 명확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로 인해, 프리메이슨의 의식은 외부인들에게는 더욱 신비롭고 모호하게 다가옵니다.

    외부의 비판과 방어
    외부인들은 프리메이슨을 자본가들의 특권 조직이자 부패의 온상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폭로하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프리메이슨 내부에서는 이러한 비판을 무시하지 않고, 조직의 선행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방어합니다. 그들은 프리메이슨이 사회적 책임감을 높이고, 많은 자선을 베풀며, 종교와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합니다.

    프리메이슨의 기원과 비밀
    프리메이슨의 진정한 기원과 비밀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이로 인해 조직의 유용성과 목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언급되는 ‘진정한 비밀’은 아직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대체된 비밀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역사가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온 것처럼 보이지만, 영국 연합 그랜드 로지조차도 그 기원을 명확히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어둠 속에 갇힌 불쌍한 입문자

    프리메이슨 입문의식은 여러 상징과 절차로 구성된 복잡한 과정입니다. 이 의식은 신비와 상징을 통해 입문자가 프리메이슨의 철학과 가치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프리메이슨단에 들어오기 위해 우리는, 적어도 250년 동안 모든 입단자들이 경험해 온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그 일환으로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프리메이슨의 어떠한 비밀도 외부세계에 누설하지 않을 것과, 우리가 이 책에 기록한 정보는 일부 메이슨들에 의해 비밀의 폭로로 여겨질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서약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국 연합 그랜드 로지는 결사단의 비밀은 단지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었다고 해도 가짜로 프리메이슨인 척할 수는 없다. 수많은 절차를 담고 있는 의식들은 우리 연구의 기초를 이루고 있기에 설명이 필요했다. 물론 의식에 사용되는 글의 일부는 암호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이 사용되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았기에. 우리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셈이다. 어떠한 경우든, 우리는 이 비밀들이 우리의 도덕적, 시민적, 또는 종교적 존재로서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것 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비밀 엄수에 동의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서약 때문에 우리가 발견한 중요한 사실들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 자유들을 침해하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1. 사전 준비

    • 인터뷰 및 준비 과정: 입문자는 의식에 앞서 프리메이슨 로지의 전 마스터들과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입문자의 동기와 자격을 확인합니다.
    • 신앙 확인: 입문자는 인터뷰 과정에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질문받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해야 입문 절차가 시작됩니다.
    • 그때부터 모든 일은 진행되어, 지금 문지기 한 명이 칼자루로 신전으로 향하는 커다란 문을 치면서 나를 들여보내도 되는지 알아보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 복장 준비: 입문자는 특별한 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이 복장은 입문자가 세속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의식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 준비됩니다. 복장은 다음과 같은 요소로 구성됩니다:
      • 입문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눈을 가립니다. 헐렁한 흰 바지와 웃옷을 입고, 한 짝의 슬리퍼를 착용합니다. 왼쪽 바짓단은 무릎까지 걷어 올려지고, 왼쪽 가슴은 맨살이 드러나도록 옷이 당겨집니다. 목에는 교수형 올가미가 걸려 등 뒤로 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목에 올가미를 맨 이 단정치 못한 웃차림이 중세 이교도들이 종교재판을 받을 때에 입던 방식 그대로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 금속 제거: 입문자의 몸에서 모든 금속(시계, 반지 등)이 제거됩니다. 이는 물질적 소유물과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의식의 시작

    • 눈가리개 착용: 입문자는 눈이 가려진 상태로 신전으로 인도됩니다. 이로 인해 입문자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며,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 성전 입장: 성전으로 들어가기 전, 문지기가 신전의 문을 칼로 두드리며 입문자의 입장을 허락받습니다. 허가가 나면 입문자는 성전으로 인도됩니다.
    • 신체적 감각 테스트: 입문자의 가슴 위에 칼날과 같은 차가운 물체가 닿습니다. 이때 입문자는 “네”라고 대답하며, “이제 네게 알려줄 비밀을 어느 것 하나라도 누설하면 이와 같이 너의 양심이 찔리며 곧바로 죽음에 이를 것이다.” 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 기본 질문: 워십풀 마스터가 입문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 “자유롭지 못하고 성숙한 나이에 이르지 못한 자는 메이슨이 될 수 없기에 네게 묻노니, 너는 자유로운 인간이며 21세가 넘었는가?”
      • “너는 친구가 부적절하게 요청하는 일들에 휘둘리지 않고, 돈이나 다른 어떤 동기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프리메이슨의 비밀과 특권의 입문자로서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기꺼이 바칠 것을 명예를 걸고 선언하는가?”
      • “나아가 너는 우리 결사단에 대한 긍정적인 선입견과 지식에 대한 욕구, 너 자신이 동료들에게 더 봉사고자 하는 진실된 바람으로부터 이러한 특권들을 원하는가?”
      • 올바른 대답을 요구: 입문자는 “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 내 가슴을 꾹 누르고 있던 칼은 사라졌지만(그때는 몰랐다) 올가미는 여전히 내 목에 둘려 있었다. 오른편에 있는 남자가 내게 무릎을 꿇으라고 속삭였고 우주의 최고 통치자(단일 신 신앙을 가진 모든 단원들에게 적용되는 신의 중립적인 표현)의 축복을 구하는 간단한 기도가 올려졌다.

    3. 어둠 속의 순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를 붙잡아주었던 자가 나를 성전 주변으로 안내하며 ‘어둠 속에 같힌 불쌍한 입문자’ 로 나를 소개하기 위해 세 번 멈추어 섰다.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만 신전 바닥의 중앙에는 흑백의 칸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쪽 끝에는 워십풀 마스터의 대좌가 있었고 남쪽에는 주니어 워든(감독관). 그리고 서쪽에는 시니어 워든의 좀 더 작은 대좌들이 있었다.

    4. 빛의 수여

    세 바퀴를 돈 뒤 여전히 눈이 가려진 채 워십풀 마스터의 대좌에 이르자 그가 물었다.
    “어둠에 갇히게 되니.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내 귀에 답이 속삭여졌다.
    “빛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다시 주어라.”
    뒤에서 누군가 내 눈가리개를 풀어주었고, 눈이 빛에 적응해감에 따라 나는 내가 워십풀 마스터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빛의 상징: 입문자는 프리메이슨의 상징적 물건들, 즉 신성한 율법의 책(기독교인의 경우 성경), 직각자, 컴퍼스를 보게 됩니다. 이는 프리메이슨의 핵심 가치와 원칙을 상징합니다.

    5. 도제 메이슨으로 인정

    워십풀 마스터는 이제 입문자가 ‘도제 프리메이슨’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프리메이슨의 첫 번째 등급입니다. 이는 이후 두 가지 추가 등급(펠로크래프트와 마스터 메이슨)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6. 교육과 상징적 설명

    • 비밀 신호와 악수법: 첫 번째 등급의 비밀 신호, 악수법, 암호가 설명됩니다.
    • 기둥의 의미: 솔로몬 왕 성전 현관 통로에 서 있는 왼쪽 기둥이 프리메이슨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오른편과 왼편 기둥 모두 로지 뒤편에 다시 세워져 있었으며, 그 사이에 워십풀 마스터의 자리가 있었다. 보아스로 불리는 왼편 기둥은 이스라엘 다윗 왕의 증조할아버지인 보아스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 에이프런 수여:
      신전 여기저기를 둘러본 뒤 나는 지금 막 얻게 된 신분을 상징하는 흰색 송아지 가죽 에이프런을 선물받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이는 스페인의 황금 양털 기사단이나 로마의 독수리 기사단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프랑스의 별 기사단이나 영국의 가터 기사단(가터 기사단은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14세기 중반 창설한 근위기사단으로, 이에 자극받아 프랑스에서는 별 기사단, 스페인에는 황금 양모 기사단 등이 창설됨.), 또는 현존하는 그 어떤 기사단보다 영예로운 순결과 우정의 기장이 될 것이다…..”

    7. 의식의 종료

    • 도덕적 훈계: 의식의 전 과정을 통해 다양한 도덕적, 사회적 덕목들이 건축적 비유들로 훈계되었는데. 그중 석공의 연장들은 자아 개발의 방법들로 비유되었다.
    • 시험 문제: 입문자는 다음 등급인 펠로크래프트 프리메이슨으로 오르기 위해 반드시 외워야 하는 시험 문제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 질문: 프리메이슨은 무엇인가?
        답: 비유로 가려지고 상징으로 그려지는 특별한 도덕체계입니다.
      • 질문: 프리메이슨이 토대로 하는 3가지 위대한 원칙들은 무엇인가?
        답: 형제애와 구원 그리고 진리입니다.
      • 어떤 지원자에게나 첫 번째 원칙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다음 두 원칙들은 이해하기 조금 힘들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어떤 진리란 말인가?
    • 축하와 환영: 의식이 끝나면 입문자를 위한 축하연이 열립니다. 이 자리에서 입문자는 워십풀 마스터의 왼편에 앉아, 로지의 프리메이슨 형제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축하와 건배를 나눕니다.

    자연과 과학의 감추어진 비밀들

    ‘펠로크래프트 프리메이슨’ 등급을 위한 제2등급 의식은 입문자가 도제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의식은 자연과 과학의 감추어진 비밀들을 탐구할 자격을 부여하며, 프리메이슨의 상징과 철학을 깊이 이해하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이 의식의 주요 순서와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1. 사전 준비

    • 에이프런 착용: 입문자는 흰 송아지 가죽 에이프런을 착용합니다. 이 에이프런은 진정한 순결과 비천한 처지를 상징하며, 입문자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 질문 테스트: 이전 의식에서 배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외우고 암송하는 시험을 치릅니다. 의미도 모르는 말을 그대로 암송하는 이 능력 시험을 간신히 끝마친 나는 잠시 성전을 떠나 ‘통과 의식’ 을 잘 준비하라는 말을 듣는다.

    2. 성전에 재입장

    • 복장 변화: 입문자는 입문식 때와 같은 복장을 하고 성전에 다시 들어가지만, 이번에는 왼쪽 다리와 오른쪽 가슴이 노출됩니다.
    • 부제의 인도: 부제副祭들이 나를 성전 여기저기로 인도하는 동안 새로운 암호들과 신호들이 등장했다. 그중에는 손을 드는 자세도 있었다. 이는 ‘여호수아가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주主의 전쟁을 치르며 적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태양이 그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 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 야긴 기둥: 입문자는 솔로몬 왕 성전의 현관 통로 오른편에 위치한 ‘야긴’ 기둥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이 기둥은 예루살렘 성전의 이 부분 헌당을 보좌했던 제사장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프리메이슨 연구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 보아스와 야긴의 상징: 두 기둥, 보아스는 ‘힘, 또는 그에게 능력이 있도다’ 를 의미하고 야긴은 ‘설립, 또는 그가 세우신다’ 인데, 합쳐지면 ‘안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3. 의식의 종료 및 축하

    • 탐구 자격 부여: 제2등급 의식이 끝난 후, 입문자는 자연과 과학의 감추어진 비밀들을 연구할 자격을 얻습니다. 이는 프리메이슨이 단순한 도덕적 체계를 넘어, 자연과학과 지식을 탐구하는 조직임을 나타냅니다.
    • 만찬과 축하: 의식이 끝나면, 다른 형제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담소와 노래를 즐기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 과정은 형제애를 강화하고, 입문자의 새로운 등급을 축하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한줄기 빛

    ‘마스터 메이슨’ 등급으로의 승격은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가장 높은 단계로 간주되며, 이 과정은 깊은 상징성과 엄숙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의식은 죽음과 부활, 그리고 도덕적 완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며, 이전 등급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종합적으로 통합합니다. 다음은 마스터 메이슨 등급 의식의 순서와 내용을 자세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1. 사전 준비

    • 에이프런 착용: 입문자는 펠로크래프트로서 2개의 푸른 장미꽃이 장식된 흰색 에이프런을 착용합니다. 이 에이프런은 순결과 지혜를 상징하며, 마스터 메이슨으로서의 새로운 신분과 책임을 나타냅니다.
    • 질문과 답변: 이전 등급에서 배운 지식과 교리에 대한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해야 합니다. 이는 입문자의 학습과 이해도를 확인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 역사적 언급: 테스트 중에 솔로몬 왕의 성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되며, 고대 메이슨 형제들이 고용주를 신뢰하며 급료를 받았다는 내용이 강조됩니다. 이러한 언급은 신뢰와 청렴함의 가치를 재확인합니다.
      문제들을 질문받고 대답하는 동안 나는 ‘우리의 오래전 형제들은 그 당시 고용주의 청렴함을 믿고 아무런 주저나 거리낌 없이 솔로몬 왕의 성전 가운데 방에서 급료를 받았다’ 는 사실에 주목했다. 왜냐하면 성서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솔로몬 성전의 중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것이 실수일 리는 없어 보이기에, 나는 그 질문들이 과거에는 형제들이 고용주들을 믿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이 단계에서 나는 또 성서에는 존재하지 않는 명확히 성서적인 인용을 듣는데, 그것은 내가 최고 등급인 마스터 메이슨이 되면 위임받게 될 임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주가 말씀하시되, 나는 나의 이 집에서 내 언약을 세우리니 이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으리라.’ 오늘날 프리메이슨들에게는 생소한. 처음 우리가 그것을 들었을 때에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인용구는 나중에 정말 중요한 것임이 드러난다.

    2. 성전 입장 및 의식 시작

    • 어둠 속의 빛: 성전은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으며, 동쪽에 위치한 워십풀 마스터 앞의 동쪽에서 단 하나의 촛불만이 빛나고 있습니다. 이 설정은 무지와 혼돈 속에서 진리와 지혜를 찾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 극적인 분위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강조되며, 의식의 주제가 ‘죽음과 부활’임을 암시합니다.
    • 이전 등급의 요약
      • 도제 등급: 신과 이웃,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의무를 배우는 단계로서의 의미를 재확인합니다.
      • 펠로크래프트 등급: 과학과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고 창조주의 위대함을 깨닫는 단계로서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 마스터 메이슨 등급 소개: 우정과 동료애로 형제들을 묶고,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통해 더 높은 지혜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 ‘형제들이여, 메이슨의 모든 등급은 진보적이며 시간과 인내, 근면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1등급에서 우리는 신과 이웃.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배웠다. 제2등급에서는 과학의 미스터리들에 참여하고 창조주의 작품들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그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알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전체를 합친 제3등급은 비밀들로써 형제들을 우정과 동료애 안에 함께 묶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죽음의 암흑과 좀 더 밝은 빛의 전조로서의 무덤의 어둠을 암시하는데, 이 빛이 의로운 자들이 부활할 때에 비추면 어둠 속에 잠자던 망자들이 깨어나 비슷한 영과 재결합하며 불멸의 옷을입고…..’
    • 기도문 낭독
      • 인도와 보호 요청: 입문자가 시련과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 무사히 부활과 영원한 빛에 이르도록 신의 은총과 보호를 구하는 기도가 올려집니다.
      • ‘……구하노니, 마스터 메이슨의 신비한 비밀들을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당신의 이 종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 그가 시련의 순간에 어둠의 골짜기를 무사히 지나도록 보호해주시고 마침내 무덤에서 일어나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날 수 있는 인내를 내려주소서.’

    3. 히람 아비프의 전설 재현

    워십풀 마스터가 말씀하셨다
    ‘….자연은 하나의 위대하고 쓸모 있는 교훈을 준다. 바로 너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연은 묵상을 통해 인생을 마치는 것을 준비하도록 가르치며.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질곡들을 통해 너를 이끌어 마침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려준다. 형제여, 이와 같은 것들이 제3등급 프리메이슨의 목적이니라. 이는 너로 하여금 그 끔찍한 주제를 생각토록 하고 올바르고 고결한 남자로서 죽는 것이 거짓과 불명예의 오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 위대한 진실들 중, 프리메이슨의 역사는 그랜드 마스터 히람 아비프의 흔들림 없는 충성심과 때 이른 죽음에 관한 영광스러운 예를 보여준다. 그는 솔로몬 왕의 성전이 완공되기 직전에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자신이 우두머리 건축가였던 건축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의 죽음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나머지 석공들을 통솔하도록 임명된 동업 장인(펠로크래프트) 15명은 성전이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지만 아직 마스터 메이슨의 진정한 비밀들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폭력 등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 비밀 들을 알아내기로 함께 모의한다. 자신들의 음모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 전날, 15명 중 12명이 그 계획을 취소했지만 나머지 고집 세고 극악한 3명은 자신들의 사악한 뜻을 꺾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마스터 히람 아비프가 매일 정오에 신에게 예배 드리기 위해 찾는 성전의 남쪽과 서쪽. 동쪽 출입문에서 각각 기다리기로 한다.

    히람 아비프는 기도를 마치고 남문을 통해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이 악한들 중 하나가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다가 다림자를 들고 히람 아비프를 위협하며 마스터 메이슨의 진정한 비밀을 요구한다. 하지만 히람은 자신의 의무대로 그 비밀들은 세상에서 세 사람만이 알고 있으며 나머지 2명의 동의 없이는 폭로할 수도,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적격한 메이슨(석공)은 언젠가 그 비밀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스스로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신성한 비밀을 누설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이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던 악한은 우리 마스터의 이마를 내려치는데, 오른쪽 관자놀이를 맞은 히람의 꿋꿋한 태도에 놀란다. 하지만 심한 타격에 히람은 비틀거리며 왼쪽 무릎을 땅에 대고 쓰러진다….’

    • 히람 아비프 역할: 입문자는 솔로몬 왕의 성전의 우두머리 건축가인 히람 아비프의 역할을 맡아 전설적인 이야기를 몸소 재현합니다.
    • 음모와 배신: 15명의 펠로크래프트 중 3명이 마스터 메이슨의 진정한 비밀을 폭력으로라도 알아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 세 번의 공격과 상징적 죽음: 히람 아비프는 성전의 남쪽, 서쪽, 동쪽 출입문에서 차례로 세 악한과 대치하며, 각각의 장소에서 비밀을 누설하라는 요구를 거부합니다.
      • 남문에서의 첫 번째 공격
        • 무기: 다림자
        • 공격 부위: 오른쪽 관자놀이
        • 결과: 히람이 왼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짐
      • 서문에서의 두 번째 공격
        • 무기: 수준기
        • 공격 부위: 왼쪽 관자놀이
        • 결과: 히람이 오른쪽 무릎을 꿇으며 쓰러짐
      • 동문에서의 세 번째 공격과 죽음
        • 무기: 돌망치
        • 공격 부위: 이마 중앙
        • 결과: 히람이 즉사
    • 의식의 재현 과정
      • 신체적 동작과 지시: 입문자는 각 공격에 따라 무릎을 꿇고, 가벼운 타격을 느끼며 전설을 몸소 체험합니다.
      • 상징적 죽음과 수의 덮음: 마지막 공격 후 입문자는 발이 땅에 붙은 상태에서 바닥에 누워지고 수의로 덮여집니다. 이는 죽음과 종결을 상징합니다.

    4. 부활과 재생의 상징

    ‘여기 이 자리뿐만 아니라 최근에 의식에 참여한 형제들아, 우리의 형제가 자신에게 맡겨진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기보다는 히람 아비프라는 프리메이슨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역할을 해주었다. 아울러 나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대들도 이것을 명심하여 시련의 상황에 처했을 때에 기억하리라 믿는다. 주니어 워든 형제여, 우리의 마스터 역할을 한 자를 잡아 일으켜라.’

    • 주니어 워든의 시도
      • 결과: 손이 미끄러져 실패
    • 시니어 워든의 시도
      • 결과: 역시 실패

    독수리 발톱 쥐기를 통한 부활
    ‘워든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노고가 헛수고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 특별한 세 번째 방법이 남아 있는데, “사자의 발톱” 또는 “독수리 발톱” 쥐기라는 방법이다. 이는 손가락 끝으로 오른쪽 손목의 힘줄을 단단히 잡고 동료들이 몸의 다섯 군데를 받쳐준 상태에서 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대들의 도움으로 내가지금 해 보이겠다.’

    • 워십풀 마스터의 시도
      • 손잡이: ‘사자의 발톱’ 또는 ‘독수리 발톱’ 그립
      • 동료들의 지원: 몸의 다섯 부분을 받쳐줌
      • 결과: 성공적으로 입문자를 일으켜 세움
    • 비밀 단어 전수: 일으켜진 후 워십풀 마스터가 입문자의 귀에 두 개의 비밀 단어를 속삭입니다. 이 단어들은 마스터 메이슨의 중요한 상징으로서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5. 상징들의 해석과 묵상

    ‘자, 내 사랑하는 형제여. 모든 마스터 메이슨들이 비유적인 죽음으로부터 들어 올려져, 이전의 노고를 함께했던 동료들과 재결합했다. 이제 원하노니. 마스터 메이슨의 희미한 빛이 오로지 미래 위를 비춰주는 것을 보라. 이는 위로부터 오는 신성한 빛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 이성의 눈이 관통해 볼 수 없는 신비한 어둠의 장막이다. 하지만 이 어슴푸레한 빛으로 너는 네가 지금 금방 비유적으로 들어갔던, 또한 이 덧없는 인생이 사그라질 때에 다시 그 차디찬 가슴으로 너를 받아들일 무덤 바로 목전에 서 있음을 알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저 죽음의 상징들을 보며 네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묵상하고 모든 인간의 연구 중 가장 흥미롭고 유용한 것인 너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되돌아보라.
    아직 낮일 때에, 네게 주어진 사명을 행하라. 불멸의 원칙을 담고 있는 자연의 목소리를 들으라. 이는 우리에게 신성한 확신을 불어넣어줄 것이며, 생명의 주主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신을 우리의 발로 밟고 눈을 들어 위를 볼 수 있도록 해줄 증거를 지니고 있도다.’

    • 죽음과 무덤의 상징
      • 두개골과 교차된 뼈: 입문자는 열린 무덤과 그 안의 두개골과 교차된 뼈를 보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상징하며, 도덕적 성찰과 자기 인식을 촉구합니다.
    • 빛과 부활의 상징
      • 밝은 아침의 별: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샛별은 희망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며, 신앙과 순종을 통해 영적인 부활에 이를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 신성한 빛: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신성한 지혜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프리메이슨의 이상을 강조합니다.

    6. 의식의 마무리

    • 암호와 악수법: 마스터 메이슨으로서 알아야 할 새로운 암호와 악수법이 전수됩니다.
    • 건축적 비유를 통한 교훈: 입문자는 건축과 관련된 비유들을 통해 사회적, 도덕적 자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 도덕적 완성: 마스터 메이슨 등급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완성을 추구하며,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상징합니다.
    • 지혜와 책임: 이 등급을 통해 입문자는 더욱 큰 지혜와 책임을 부여받으며, 프리메이슨 공동체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 영원한 진리 탐구: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통해 입문자는 영원한 진리와 지혜를 향한 끝없는 탐구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아울러 나중에 다른 정규로지 모임에서 히람 아비프 살해 뒤의 이야기를 듣는다.

    ‘각 부서에 인부들의 총 소집이 있었는데, 감독 격의 3명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그 음모를 획책했던 12명의 장인들이 왕 앞으로 나아와 자신들이 공모에서 빠져나온 때까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자백했다. 당연히 자신의 우두머리 장인의 안전이 걱정되었던 왕은 15명의 믿을 만한 펠로크래프트(동업 장인)들을 뽑아 히람을 찾아, 아직 살아 있는지, 비밀을 말할 것을 강요받아 고통받지는 않았는지 알아보도록 명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날을 정한 뒤, 그들은 3개의 펠로크래프트 로지로 나뉘어 성전의 세 출입구를 출발했다. 아무런 성과 없이 수일이 흘렀고. 한 팀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두 번째 팀에게는 운이 따랐다. 심한 궁핍과 피로로 고생하던 중, 어느 날 저녁 누워 쉬던 한 형제가 일어나려고 근처의 작은 나무를 잡았는데 너무도 쉽게 뿌리가 뽑혀 놀라게 된다. 자세히 보니, 그 땅은 최근에 파헤쳐졌던 흔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을 불러 힘을 합쳐 무덤을 열고 그곳에서 흉측하게 매장된 우리 마스터의 주검을 발견한다. 그들은 존경과 예를 다해 무덤을 다시 덮고 무덤 머리에 아카시아 가지를 꽃아 그 지점을 표시한 다음, 솔로몬 왕에게 그 비보를 전하기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슬픔이 가라앉자 왕은 그들에게 무덤으로 돌아가 우리의 마스터를 들어 일으키라고 명하고, 동시에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서 마스터 메이슨(우두머리 석공)의 비밀들이 사라져버렸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 죽은 대가에 대한 마지막 조의를 표하면서 뜻하지 않은 표시나 증거 등이 있는지 특히 주의해서 볼 것을 이른다…..’

    그러고 나서 나의 역할극에서처럼 펠로크래프트들이 히람 아비프를 일으켰고, 그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마스터 메이슨을 임명할 때에 그 방법이 사용되었다는 설명이 있었다. 의식은 계속되었다.

    ‘한편 조파(오늘날의 요파)로 조사를 떠났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던 세 번째 팀은 우연히 한 동굴 입구를 지나다가 깊은 애도와 후회의 소리를 듣는다.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동굴로 들어가던 그들은 그 속에 있는 자들이 살인자들임을 알고는, 모든 출구를 막고 그들의 범행에 대한 자백을 얻었다. 이에 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호송하니 솔로몬 왕은 그들의 극악한 범죄에 부응할 만한 죽음을 선고한다.
    그 후 우리의 마스터는 이스라엘 법에 따라 지성소 근처에 다시 묻힌다. 중앙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3피트( 90센티미터), 북쪽과 남쪽 사이 3피트. 그리고 5피트(1.5미터)가 넘는 높이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히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세속적이고 부정한 누구도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조차도 1년에 한 번밖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것도 모든 육체는 부정하디는 이스라엘 법에 따라 속죄의 의미로 수도 없이 씻고 정화를 한 뒤에나 가능했다.
    15명의 믿음직한 펠로크래프트들은 순결의 상징으로 흰 앞치마와 흰 장갑을 끼고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명을 받았다.’

    행사는 제1, 2등급 때와 비슷하게 진행되었고 나는 완전한 마스터 메이슨으로 태어났다. 몇 개월 후, 그 로지 모임에서 진급 대상자가 아무도 없자, 한 전前 마스터가 제3등급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히람 아비프를 죽였던 그 세 악한들은 주벨라Jubela, 주벨로Jubelo, 주벨럼Jubelum으로 밝혀졌는데, 모두 함께 주이스Juwes로 불렸다. 그는 동굴에서 울려 나오던 ‘깊은 애도와 후회의 소리’ 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살인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만행을 깊이 후회하며 그에 응당하는 끔찍한 형벌을 원했고. 솔로몬 왕은 각각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형벌에 처한다. 이것들은 의식에서는 설명되어지지만, 그것이 메이슨 신분증명 방법 중의 하나이기에 우리는 여기에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결론

    황금 양털 기사단이나 로마의 독수리 기사단보다 오래되었다고 주장하는 프리메이슨단은 형제애와 구제 그리고 진리를 목표로 하며, 자연과 과학의 숨겨진 미스터리들을 연구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라진 결사단의 진정한 비밀은 다시 발견될 때까지 대체 비밀들로 대신된다.
    프리메이슨의 핵심 인물은 솔로몬 왕 성전의 건축가인 히람 아비프라는 자로, 그는 자신이 이끌던 장인들 세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입문자의 양식화된 죽음과 부활은 그를 마스터 메이슨으로 만드는 행위이며, 무덤에서 들릴 때에 밝은 아침 샛별이 지평선에서 빛난다.

    1. 히람 아비프의 신비성: 히람 아비프는 프리메이슨 전통에서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지만, 유대-기독교 신화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정체와 역할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으며, 이러한 신비성은 프리메이슨 의식의 중심 요소로 작용합니다.
    2. 프리메이슨 의식의 해석: 일부 프리메이슨 회원들은 이 의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다른 회원들은 도덕적 또는 상징적 우화로 해석합니다. 이는 종교적인 신앙과 프리메이슨 의식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어집니다.
    3. 프리메이슨의 종교적 중립성: 프리메이슨 의식은 종교적 초자연성을 포함하지 않으며, 이는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프리메이슨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는 프리메이슨이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종교적 믿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4. 기원에 대한 의문: 글에서는 히람 아비프 이야기의 기원과 프리메이슨 의식의 출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러한 의문은 역사적 탐구의 동기로 작용하며, 프리메이슨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5. 의식의 상징적 의미: 프리메이슨의 의식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으며, 회원들이 도덕적,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이 의식들은 프리메이슨이 추구하는 형제애, 진리, 연구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Chapter 2 요약: 연구의 시작과 프리메이슨 기원의 탐구

    이 장에서는 프리메이슨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저자들이 주목하는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성전 기사단 기원설이 특히 흥미로운 연구 주제로 떠오르며, 저자들은 이를 중심으로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의식의 뿌리를 밝히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프리메이슨 의식의 기원과 그 상징들이 현대 프리메이슨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결사단의 유래

    이 책의 제2장에서 저자들은 프리메이슨의 기원에 대해 세 가지 주요 가설을 소개하고, 각각의 타당성을 탐구하면서 자신들의 연구를 설명합니다.
    1717년 영국 그랜드 로지의 설립 이래, 결사단은 자신의 존재에 관해 개방적이었다. 오직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들만이 일반에게 노출되지 않았을 뿐. 하지만 우리가 지금 프리메이슨이라고 부르는 조직은 17세기 중반 이전의 비밀조직이었고, 정의대로라면 비밀조직은 공식 역사를 밝히지 않는다. 그에 따라 메이슨단이 일반에게 알려지기’ 전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 우리는 메이슨 역사가들이 고려했던 3가지 중요한 가설들이 있음을 알아내었다.

    1. 솔로몬 성전 기원설: 이 가설에 따르면 프리메이슨은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던 시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가설을 연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 접근을 일단 배제합니다.
    2. 중세 석공 조합 기원설: 이 가설은 프리메이슨이 중세의 석공 조합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를 조사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반박 요소를 발견합니다. 특히, 영국에서 중세 석공 조합의 존재를 입증할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당시 석공들이 복잡한 의식이나 암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아울러 그들이 그 외 유럽지역에서는 존재했다는 사실 또한 프리메이슨단이 이 유럽 조합들이 형성된 지역에서는 발전하지 않았기에 의미가 없다. 저자들은 이 가설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결론 내립니다.
    3. 성전 기사단 기원설: 세 번째 가설은 프리메이슨이 성전 기사단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입니다. 성전 기사단은 12세기에 창설된 십자군 수도사 기사단으로,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다고 믿어집니다. 이 가설은 프리메이슨의 상징 중 일부가 성전 기사단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저자들은 이 가설을 보다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며, 프리메이슨과 성전 기사단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합니다.

    저자들은 중세 석공 조합과 솔로몬 성전 기원설을 배제하고, 성전 기사단과 프리메이슨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합니다. 프리메이슨이 초기 성전 기사단과 깊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가설을 통해 프리메이슨의 기원을 설명하려 합니다.
    노동을 제공하고 형제의 여성 가족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포함하는 결사단의 고대 훈령에서 보이는 규약은 순회 건축가들의 집단보다는 비밀 조직에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 가장 오래된 것이 15세기 말의 것으로 여겨지는 프리메이슨 단의 ‘구舊 훈령’ 을 연구하다가 ‘석공 가설’ 을 버릴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 이 훈령은 프리메이슨 단원의 행동과 책임을 정한 것으로, 중세 석공조합의 행동규칙에서 취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 훈령 중의 하나가 ‘어떤 형제도 다른 형제의 생명과 재산에 해가 갈 수 있다면 어떠한 합법적인 비밀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 다. 당국에 의해 적발될 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그 시대의 유일한 합법적인 메이슨 비밀이라면 아마 이설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기독교인 석공들이라면 절대로 행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범죄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 성과 성전 건축가들의 비밀이 이설일 것이라고 생각될까?’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직들은 그들의 단원이 은밀하게 교회에 반하는 죄인이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규칙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게 누구든 이 훈령을 만들어낸 누군가는 모든 형제들이 이단으로 몰릴 위험을 가지고 살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규칙들이 단순한 석공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그 나라 법의 언저리에 살았던 집단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확신했다.

    우리는 이렇듯 석공 가설을 지지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반박할 것만 수두룩한 데에 만족스러웠다. 반면 그 고대의 훈령’이 언급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점점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역사가들이 많이 논의해 왔던 동시대의 또 다른 훈령은 매우 비밀스러운 고대의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2주 동안 방문하고 있는 형제를 ‘고용’ 한 뒤 “그러고 나서 그는 돈을 받아 다음 로지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삐 이동하면서 안전한 거처를 찾는 자를 위한 대접이다.
    반면 또 다른 훈령은 메이슨들이 형제 메이슨의 아내나 딸, 엄마나 여형제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는 ‘안전가옥’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즉 집에 돌아왔는데, 자신의 침대에 자신의 아내나 딸이 메이슨 손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느니, 형제애의 서약을 깨는 것이 낫다는 것. 우리는 이 초기 메이슨 집단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또한 교회 및 국가 밖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고도로 구조화된 체계를 만들어낼 만큼 죄책감을 느꼈을 이설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성전 기사단’, 정식 명칭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청빈한 동료 기사들The Poor Fellow Soldiers of Christ and the Temple of Solomon’ 은 영국의 그랜드 로지가 설립되어지기 거의 600년 전에 창설되었다. 이 십자군 수도승 기사들과 프리메이슨단 간에 어떠한 연관이 있다면, 우리는 1307년 10 월 기사단의 갑작스런 소멸과 프리메이슨단의 공식적 출현이 있기까지의 410년을 설명해야만 한다. 이 시간적 간극 때문에 메이슨이건 그렇지 않든 간에 수많은 연구자들은 이 가설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이 이론을 지지하는 것들이 비의적인 난센스를 믿도록 하는 소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들을 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증거들은, 논의의 무게를 성전 기사단과 프리메이슨단의 연관 쪽으로 옮겼으며, 우리 자신의 연구 또한 그것을 증명했다.

    솔로몬 성전

    우리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모리아 산과 연관된 성전이 네 곳 있음을 알아냈다.
    역사는 한 장소에 3개의 석재 성전과 더불어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 들에게 영감을 주어 왔기에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상상의 성전이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솔로몬을 위해 지어진 원래의 성전은 그의 첩들을 위한 건물보다도 작은 수메르식 건물로서, 예배의 장소가 아닌 까다로운 태풍의 신 야훼의 거처로 세워졌다. 야훼 자신이 언약의 궤 안에 살았고 이 언약의 궤는 프리메이슨에게 상툼 상토룸으로 알려진 성전의 지성소 내에 안치되어졌다. 이 궤는 이집트식으로 만들어지고 꾸며졌으며. 이 첫 번째 성전의 동쪽 출입구에는 프리메이슨에게 보아스와 야긴으로 알려진 2개의 기둥이 서 있었다. 프리메이슨이 세계가 모르는 비밀을 가진 조직으로서 솔로몬으로부터 내려왔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하나의 기원 기설만이 남는다. 우리는 초기 성전 기사단이 마지막 성전의 터를 발굴 했으며, 수많은 저자들이 이 기사단과 메이슨단의 연관을 보여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1. 첫 번째 성전: 3천 년 전 솔로몬 왕이 지은 원래의 성전으로, 기원전 약 10세기경에 건축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야훼의 거처로서 기능했으며, 언약의 궤를 보관하기 위한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2. 에스겔의 환상 속 성전: 기원전 570년경 유대인들이 바빌론의 노예가 되었을 때에 선지자 에스겔이 본 환상 속의 신전입니다. 이 성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유대 신앙과 후대 기독교 신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 스룹바벨 신전: 바빌론 유수 이후 유대인들이 돌아와 지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기원전 6세기 초에 지어졌으며, 원래 성전의 규모와 영광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4. 헤롯 성전: 기원전 1세기경에 헤롯 대왕이 재건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에 존재했으며, 완성된 지 4년 만인 서기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오늘날 야훼 또는 여호와라고 부르는 신을 모시기 위한 성전을 비롯한 거대한 건축물들을 많이 세우기 시작했다. 솔로몬 왕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으로 유명하지만, 연구를 진행해 나감에 따라 우리는 솔로몬 이전에 수천 년 동안 건축물을 후원했던 모든 건축자들과 왕들에게 ‘현명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음을 알아냈다.

    어떠한 건축적 유산도 없었던 유대인들은 간단한 벽 하나 세우는 것 이상의 건축기술도 갖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은 티레의 페니키아 왕인 히람으로부터 고용된 장인에 의해 지어졌다. 비록 그 이름은 우리와 이전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친숙하지만, 히람 왕은 히람 아비프와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13장에서 좀 더 논의하게 될 홀리 로열 아치 등급의 의식은 티레 왕 히람이 자재를 제공하고 또 다른 히람인 히람 아비프가 성전의 실질적 건축가였음을 확실하게 해주며, 심지어 이 세 인물(솔로몬과 2명의 히람)이 중요한 로지를 세웠고 마스터 메이슨의 진정한 비밀들을 유일하게 공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메이슨 입장에서는 이 성전이 건축 역사상 획기적인 건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고 보지만, 클라크와 다른 전문가들은 그 스타일과 크기, 설계가 그 보다 거의 천 년 전에 니누르타 신을 위해 세워진 수메르의 신전을 본떴다고 생각한다. 이 신전은 보통 영국 마을 교회 크기의 작은 건물로 솔로몬 궁정 크기의 반도 안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이 하렘을 위해 지은 건물이 적어도 야훼 성전만큼 컸다는 사실을 알아낸 우리는 그 위대한 왕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교회와 회당, 모스크가 세워진 목적을 안다면, 솔로몬 성전이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기 위한 장소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성전은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기에 이 경우에는 틀렸다. 아주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신의 처소’, 즉 야훼만을 위한 집이었던 것이다.
    돌 하나도, 특별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현재로서는, 아무도 그 성전이 정말 존재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때의 한참 후에, 구전 전통을 기록했던 유대인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신전 중 가장 유명한 이 건물은 돌로 지어 졌으며 내부는 티레에서 공수해온 백향목으로 되었다고 한다. 기저부가 9큐빗(4미터 정도) 두께인 벽이, 전나무로 덮인 평평한 삼나무 목재지붕을 받치고 있다. 이 성전의 눈에 띄는 특징은 케루빔 조각(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람의 얼굴 또는 짐승의 얼굴에 날개를 가진 초인적 존재)과 개화한 꽃들 사이에서 바닥과 벽. 천장을 덮고 있는 엄청난 양의 황금이었다. 내부는 길이 90피트(27미터) 정도에 넓이 30피트(9미터) 크기이며, 서에서 동으로 배열된 전체 건물의 입구는 동편 끝에만 하나가 있었다. 또, 한 쌍의 접이식 문이 있는 칸막이가 실내를 나누어 가운데에 높이. 넓이. 길이가 각 9미터인 입방체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는 ‘지성소’ 로, 메이슨 의식에서는 ‘상툼 상토룸’ 으로 불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바닥 정중앙에 놓인 길이 4피트(1.2미터), 넓이와 높이 2피트(61센티미터)의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직사각 상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궤다. 안에는 십계가 적힌 2개의 석판과 야훼 그 자신만이 들어 있다. 위에는 견고한 두꺼운 금판과 함께, 금으로 두껍게 싸인 목재 케루빔이 날개를 뻗어 이 귀중한 내용물들을 지키고 있었다.
    이 케루빔은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인기 있었던, 후광을 쓰고 날아다니는 통통한 아기들이 아니었다. 이집트식으로 피라미드 벽과 석관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지성소는 1년 중 속죄일 단 하루만을 제외하고는 어둠에 갇혀 있었는데, 그날은 대제사장이 국가적 속죄를 위한 제물인 희생양의 피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간다. 대제사장이 떠난 뒤에는 거대한 금사슬로 문을 둘러 더 작은 방을 큰 방으로부터 봉쇄했다. 후대 유대 전통에 따르면, 이 방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세습 제사장)만이 사용했으며 문들 바로 앞에는 황금으로 덮인 삼나무 제단이 놓여 있었다. 또, 동쪽 출입구 밖에는 당연히 2개의 기둥 보아스와 야긴이 서 있었다.

    성전 기사단은 이 건물을 자신들 결사단의 핵심 아이콘으로서 숭배했다. 하지만 그들이 발굴했던 건물은 또 다른 성전의 유적으로, 악명 높은 헤롯왕이 같은 자리에 거의 정확히 천 년 뒤에 세웠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솔로몬 성전의 이름을 따라 정했을까?


    제3장: 성전 기사단 (Knights Templar)

    기사단의 기원

    흰 망토에 붉은 십자가를 두르고, 수염을 기른 채 악을 물리치고 순결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결연히 싸우는 십자군 전사의 모습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징적인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낭만적인 성전 기사단의 이미지는 복잡한 현실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흰 망토에 붉은 십자가를 두른 것은 모든 십자군이 아니라, 성전 기사단이라 불리는 특정 집단만이 가진 상징이었습니다. 이들은 신비롭게도 갑자기 권력을 쥐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에 돌연 해체되었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종말은 수많은 추측과 전설을 낳았습니다.

    약 200년 동안 성전 기사단은 전례 없는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들의 군사적 능력과 소문으로만 전해지는 보물들은 이들을 매혹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세 기사단과 현대 프리메이슨 사이에 정말로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세계처럼 보이지만, 깊이 파고들수록 그 간격은 점점 좁아집니다.

    7세기 이후 예루살렘의 이슬람 통치자들은 유대교와 기독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며 이 도시의 종교적 중요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11세기 말, 예루살렘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족은 기독교 순례를 금지하였고, 이는 기독교 세력이 성전이라 불리는 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성스러운 목적이 있었지만, 이 전쟁들은 잔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재탈환된 후, 기독교 순례자들은 점점 더 많이 성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은 길고 위험했으며, 이는 예루살렘의 아말피 병원과 같은 시설의 설립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병원은 성 요한 기사단이 운영하며 순례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했습니다. 이들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들의 부도 증가했고, 예루살렘의 기독교 통치자들로부터 후하게 보상받았습니다. 결국 이 작은 조직은 성 요한 예루살렘 기사단으로 불리는 군사 조직으로 성장했으며, 1118년에 교황의 공식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프랑스 샹파뉴 출신의 귀족인 위그 드 파옹(Hugues de Payens)은 이 기사단에 영감을 받아 여덟 명의 기사와 함께 ‘그리스도와 솔로몬의 성전의 가난한 기사단’을 비공식적으로 창설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통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는 이 새로운 기사단을 지원하며, 솔로몬 성전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알 아크사 모스크 근처의 자신의 궁전에 그들에게 숙소를 제공했습니다. 성전 기사단의 주요 임무는 위험한 야파-예루살렘 간의 길에서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초기 기사들은 평신도로서 가난, 순결, 복종의 서약을 하고 수도승처럼 생활했으며, 처음에는 특별한 복장을 입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종교적 조직의 일원으로 행동했습니다. 1118년에 이들은 프랑스를 떠나 유대 사막의 수호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 유명한 이야기는 몇 가지 의문점을 남깁니다. 왜 이 프랑스인들이 그렇게 위험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 임무를 자처했을까요? 그리고 보두앵 2세의 수석사제였던 샤르트르의 풀케르(Fulcher of Chartres)의 상세한 연대기에서 왜 그들이 처음 9년 동안 전혀 언급되지 않았을까요?

    성전 기사단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1121년에 나타납니다. 당시 앙주(Anjou) 백작이었던 풀크 5세는 그들의 숙소에 머물며 30 앙주파운드(Angevin pounds)의 관대한 연금을 남겼습니다. 이는 그들이 초기에 작은 규모의 평범한 집단이었음을 시사하며, 위그 드 파옹이 그들의 본거지에서 9년을 보낸 후 새로운 구성원을 모집하기 위해 서쪽으로 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나?

    초기 성전 기사단의 순례자 보호 임무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대신, 이들이 헤로데 성전의 폐허 아래에서 발굴 작업을 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많은 저자들이 성전 기사단의 진정한 설립 목적에 대해 추측해 왔습니다. 프랑스 역사가 가에탄 들라포르주(Gaetan Delaforge)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아홉 명의 기사들이 수행한 진정한 임무는 이 지역을 조사하고, 유대교와 고대 이집트의 비밀 전통의 본질을 담고 있는 특정 유물이나 문서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 중 일부는 모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연구자이자 저자인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은 이 이론을 지지하며, 성전 기사단의 주된 관심은 성전 부지에 있었고 그곳에서 광범위한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고고학자의 공식 보고서를 인용하며, 성전 기사단이 성전 폐허 아래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발굴 작업을 했다고 언급합니다:

    “약 30미터 정도 안으로 터널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돌 부스러기들이 길을 막는다. 우리는 그 뒤로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슬람 당국의 허가를 먼저 얻은 뒤에 현재 이슬람 관할하에 있는 성전 터를 발굴키로 엄격히 정했다. 당국은 터널의 노출된 부분만을 조사하고 사진 찍도록 허가했을 뿐, 그 어떤 발굴 작업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작업을 마치고….. 우리는 터널의 입구를 돌로 막았다.”

    또한 19세기 말 영국 왕립 공병대의 찰스 윌슨 중위는 성전 폐허 아래에서 성전 기사단과 관련이 있다고 믿어지는 많은 오래된 유물들을 발견했습니다.

    이 증거들은 저자들이 스코틀랜드 성전 기사단의 기록 보관자 로버트 브라이돈(Robert Brydon)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성전 아래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실제로 성전 기사단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발견은 또 다른 질문을 낳았습니다. 성전 기사단은 무엇을 찾고 있었으며, 결국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일부 저자들은 이들이 성전의 잃어버린 보물, 성배, 또는 언약궤를 찾고자 했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찾고자 했는가보다는 실제로 무엇을 발견했는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이 보물 사냥꾼들은 9년 동안 성스러운 유대교 성전의 부지를 세심하게 발굴하며 그들의 임무가 완료될 때까지 새로운 회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원래 계획을 바꾼 무언가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1126년에 발생한 보두앵의 죽음이 위그 드 파옹으로 하여금 더 많은 구성원을 서쪽에서 모집하도록 촉구했을 것이며, 그는 300명 이상의 새로운 기사들, 막대한 부, 그리고 가장 흥미롭게도 교황의 승인을 받아 돌아왔습니다.

    성전 규율 (Templar Rule)

    기사단의 미래에 대한 우려로 인해 위그 드 파옹은 유럽 전역에서 모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그의 편지에는 성전 기사단의 임무에 대한 깊은 걱정이 담겨 있으며, 원래의 목적이 악마의 영향을 받아 약해졌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의 동행자인 앙드레 드 몽바르(André de Montbard)는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후일 성자로 추대되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삼촌이었으며, 그는 성전 기사단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베르나르의 지지는 기사단의 교황 인정을 이끌어냈으며, 1128년 1월 31일 트루아 공의회에서 ‘라틴 규율(Latin Rule)’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규율은 성전 기사단을 정당화하고 교회 내에서 그들의 위치를 확립해주었습니다.

    라틴 규율은 그 내용보다 생략된 부분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이 규율에는 성전 기사단의 주요 임무인 순례자 보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생략, 그리고 기사단의 부와 권력의 증가는 성전 기사단 설립의 핵심에 매우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있음을 시사하며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새로운 모집자들은 가난, 순결, 복종의 서약을 하며, 모든 개인 재산을 기사단에 기부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전 기사단은 상당한 부와 영향력을 축적했고, 기독교 세계 전역의 영향력 있는 영주들로부터 기부와 지원을 받았습니다. 위그 드 파옹이 2년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기사단은 300명 이상의 귀족이 그의 지휘 아래에 있는 등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라틴 규율’을 받은 지 10년 후, 성전 기사단은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기존 규율을 대체하는 새로운 ‘프랑스 규율’을 그들만의 언어로 제정했습니다. 이 새로운 규율은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며, 특히 새로운 구성원을 위한 1년간의 견습 과정을 폐지했습니다. 더 흥미롭게도 중요한 조항이 변경되었습니다. 라틴 규율에서는 구성원들이 파문되지 않은 기사들의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프랑스 규율에서는 파문된 기사들의 회의에 참석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 변화는 성전 기사단의 성장하는 자율성과 권력을 강조하며, 이들이 실질적으로 교황법의 관할 밖으로 자신들을 위치시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전 기사단의 권력 상승과 그들의 진정한 임무를 둘러싼 신비는 역사가들에게 여전히 매혹적인 주제이며, 이들의 고대 비밀과 현대 프리메이슨의 기초와의 연관성에 대한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성전 아래에서 그들이 발견한 정확한 내용은 역사의 지속적인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기사단의 조직

    성전 기사단은 기사들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정식 기사단원들 말고도 2개의 하위계급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기사들과 같은 귀족계층 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우리가 노동계층이라고 말하는 모집된 하사관들 계층이다. 그들은 마부나 집사, 파수병 및 일반적인 지원군의 역할을 했다. 상위계급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붉은 십자를 착용했지만 외투 자체는 흰색이 아니라 암갈색으로 기사들에 비해 순결함이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계층은 기사들의 영적 생활을 도와주는 성직자들이다. 그들은 기사단에서 유일하게 박식한 신부 단원들로, 기록 보관이나 의사소통, 때로는 복잡한 암호로 글을 쓰는 일을 맡는다. 프랑스어가 기사단의 일상 언어이자 행정언어였지만 이 다재다능한 신부들은 라틴어로 예배를 집도하며 현지 상인들과는 아라비아어로 흥정하고, 히브리어로 된 구약과 그리스어로 된 신약을 읽을 수 있었다. 아울러 전사들의 영적 요구를 돌보아주었으며, 기사단의 십자가가 박힌 녹색 외투를 입어 구별되었다.

    오늘날의 신부들처럼 이 성직자들 또한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를 신성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 과정은 휠씬 중요하게 여겨져, 성찬식 동안 실제로 빵을 다룰 때를 빼고는 언제나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고 한다. 빵은 일상의 세속적 더러움으로 더러위져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신의 성체를 다루듯이 손을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흰 장갑을 꼈던 것. 흰 장갑을 끼는 것은 현대 프리메이슨과 확실히 똑같다. 프리메이슨들은 로지 모임에서 언제나 흰 장갑을 낀다. 왜 이런 관행을 지키게 되었는지 이유는 주어진 적이 없다. 혹시 성전 기사단과의 관련 때문일까?
    메이슨과의 또 다른 관련성은, 그들의 종규에서 금욕의 상징으로서 외투 아래에 언제나 꽉 끼는 양피 속바지를 입도록 했던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오직 양피만을 사용해서 장식했다는 점이다. 오늘날과 같은 위생시대에는 위험한 발상이겠지만, 이 성실한 기사들은 씻을 때조차도 속바지를 벗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오늘날의 프리메이슨들은 속바지를 입는 대신 로지 모임에서 새끼 양피로 된 에이프런을 입는데, 이는 순결과 우정을 상징하는 표지라고 한다.
    유사점 하나가 더 있었다. 기사단의 전투 깃발인 ‘보쌍’ 이 검고 흰 2개의 블록이 위아래로 놓인 것이라는 사실. 검은색은 기사들이 기사단에 입단하면서 뒤에 두고 온 죄악의 세계를 상징하고, 흰색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을 나타낸다. 현대 프리메이슨의 로지는 언제나 중앙에 희고 검은 사각 무늬를 배치하며 로지 모임에서 모든 형제들은 흰색 셔츠에 검은 타이와 양복을 입는다. 만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입장할 수가 없다. 왜 프리메이슨이 새끼 양피와 흑백 복장을 해야 되는지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알려진 이유는 ‘우리의 선배 형제들이 언제나 이렇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공통점들이 있지만 찾고자 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점들을 너무 강조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연히 얻은 이런 강력한 우연의 일치들은 두 결사단 간의 좀 더 밀접한 연관성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의를 부추기기에는 충분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성전 기사단이 그토록 발전할 수 있도록 해준 그들의 발견물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

    우리는 이제 성전 기사단이 헤롯 성전의 폐허를 힘들여 파헤쳤다는 사실과 결국에는 이교도로 몰려 몰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기사단이 이교도의 신앙을 가지고 기괴한 의식들을 행했다면, 이는 그들이 발견한 문헌 때문이었으리라는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이 12세기의 기사들 이 고대의 기록들을 발견해내었다면, 그 당시에는 그들만이 그것들을 해석 하고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기사들 자신들은 문맹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들의 성직자들은 여러 언어로 읽고 쓰기가 가능했으며 암호를 만들어내고 해독하는 능력으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Chapter 4_ 영지주의와의 연관성

    숨겨진 사본들
    20세기는 잃어버린 사본들이 재발견된 시대로,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쿰란에서 발견된 이른바 ‘사해 사본’과 1945년 이집트 상부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복음서’입니다. 현대 프리메이슨은 종종 여러 면에서 ‘영지주의적’이라고 묘사되며, 이는 저자들이 템플러가 이러한 고대 문서와 관련된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조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영지주의 복음서
    오늘날 ‘영지주의Gnostic’라는 용어는 초기 교회에서 한때 영향을 미쳤으나 나중에 이교에서 유입된 신화적 요소로 인해 이단으로 간주된 고대 문서들의 집합을 가리킵니다. 일부 영지주의 문서에는 소년 예수가 분노로 다른 아이들을 죽이고 희생을 치른다는 것과 같은 기이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다른 문서들은 예수에게 귀속된 명확하고 단순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영지’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gnosis에서 유래하며, 이는 지식이나 이해를 의미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아 인식과 자연 및 자연 과학에 대한 이해를 신에게 이르는 길로 여겼으며,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 아닌 신에게 이르는 길을 밝혀준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고타마 붓다나 무함마드가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했던 역할과 유사합니다.

    영지주의 복음서는 신약 성서만큼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학계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45년 12월, 52개의 콥틱어로 된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상이집트 나그 함마디 근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은 350년에서 400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보다 약 300년 전에 작성된 저서들의 사본으로 여겨집니다.
    이 문서들은 현지 아랍 소년 무함마드 알리 알-삼만과 그의 형제들이 육중한 돌 근처 부드러운 흙 속에 묻혀 있던 약 1미터 정도 높이의 봉인된 붉은 단지에서 발견했습니다. 보물이 들어 있을 것을 기대한 형제들은 단지를 깨 부수었지만 실망스럽게도 그 안에는 가죽으로 묶인 열세 권의 파피루스 책들만이 있었다. 그나마 건조한 그 책들이 불 피우는 데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간다. 다행히 어린 무함마드 알리는 경찰의 발견을 두려워하여 그 책들을 현지 사제인 알-쿰무스 바실리우스 압드 알-마시에게 맡겼고, 당연히 그 문서의 중요성을 알아본 사제는 일부를 카이로로 보내 평가받게 했습니다. 이 문서들은 결국 스위스 취리히의 융 재단 소속 교수인 질레스 퀴스펠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마 복음서의 페이지를 확인했고, 이 페이지는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놀란 그는 황급히 나머지 문서들을 찾는데, 그것들은 이미 카이로 콥틱 박물관에 보내져 있었다.

    퀴스펠 교수는 이 재발견된 사본들이 약 1,600년 전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형성에 결정적이었던 시기에 묻혀 있던 미지의 문서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서들은 기독교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어 억압되었습니다. 만약 이 문서들이 억압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수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적 정통성은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조직적이고 신학적인 구조는 이 문서들에 담긴 사상을 억압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적 부활

    2개의 초기 기독교 전통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매우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영지주의 문서들은 부활을 신체의 부활이 아닌, 한 사람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나는 깨달음의 순간으로 설명합니다. 영지주의 신앙에 따르면, 평범한 인간 존재는 영적으로 죽는 것으로 설명되는 반면, 삶 속에서 이 영적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외경 *필립 복음서*는 “부활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무지한 기독교인들”을 조롱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부활을 받아들여야 한다.”

    영지주의 교회들은 부활에 관한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바보들의 신앙”으로 간주하며, 죽은 스승의 몸이 실제로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영적 진리를 실제 사건과 혼동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가르침의 비밀이 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마태복음 13장을 인용했습니다:

    “천국의 비밀은 너희에게 주어졌으나, 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의 비밀 지식이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즉 그것은 영적인 눈으로 ‘주를 보는’ 자는 누구든 자신의 권위가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에 필적하거나 심지어는 더 앞설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치적 위협은 2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이자 가톨릭 정통 교리의 아버지인 이레니우스의 저작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는 영지주의적 견해가 교회 권위에 미칠 위험을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의 위대함에 있어서 누구도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심지어 베드로나 바울, 또는 어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여전히 유대교적 견해 내에서 복음을 가르친다고 말하며, 그들 자신은 사도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냈으며, 더 현명하고, 더 지혜롭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영지주의 스승들은 사도 전통의 진정한 출처를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교회 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르침과 정반대가 되는 주장이었다. 영지주의 *베드로 묵시록*에는 종교적 권위에 관한 정통 교회의 주장에 대해 부활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설명하는 다음 글을 가지고 반박하고 있다.

    “자신을 주교나 부제로 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은 사실상 물이 없는 운하다. 그들은 비밀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진리의 비밀이 자신들만의 전유물인 양 떠벌리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고 진정한 기독교의 형제애 대신 거짓 교회를 세운 것이다.”

    영지주의 복음서를 번역했던 학자들은 이 관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어느 날, 셰필드 대학 도서관에서 영지주의 학자 일레인 페이절스가 쓴 다음 글을 발견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의 부활 개념이 가진 정치적 중요성을 알게 된다.

    “부활 교리가 가지는 정치적 함의를 깨닫는다 해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경험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회 질서 측면에서 보면… 부활에 관한 정통 교의는 다른 영향을 끼쳤다. 즉, 그것은 신에게로 이르기 위한 사람들 사이의 계급을 합법으로 인정한 것이다. 영지주의 교리는 이 질서를 파괴했으며, 모든 신자들에게 사제나 교주들은 모르고 있는, 신에게로 이르는 직접적인 길을 가르쳐준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부활에 대한 이 해석이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거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이유로 이단으로 규탄받은 이른바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의 영적 부활’ 에 대한 비밀 전통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비난받았던 이유는 지식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이 정통 교회의 주교의 권위를 해쳤기 때문이었다.

    부활은 프리메이슨 제3도 의식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단 여기서는 불법적인 살인과 시체의 복구 및 재매장 이야기가 뒤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들은 템플러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결론을 내리기 위해 추가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저자들은 번역된 나그 함마디 문서들을 계속 읽었고, *도마 복음서*에서 추가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이 복음서에는 마크 메이슨리 의식과 직접 관련된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보여주어라. 그것이 초석이다.’”
    ‘예수 가라사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내게 보이라. 그것이 바로 모퉁잇 돌이니라.”‘

    이 구절은 신약 성서의 구절을 반영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는 주께서 행하신 것이며, 우리 눈에 놀랍도다.’” (*마태복음* 21:42)

    “너희는 이 성경 구절을 읽지 못하였느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초석이 되었다.’” (*마가복음* 12:10)

    “예수께서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물으셨다. ‘그러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 기록된 의미가 무엇이냐?’” (*누가복음* 20:17)

    이 공관복음서 구절들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버림받은 초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도마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버려진 돌을 보여달라고 명시적으로 요청하십니다. 이는 마크 메이슨리 의식에서의 요청과 동일하여 프리메이슨과 영지주의 간의 연결을 암시합니다. 또한, 다른 문서인 *도마 행전*에서는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한 사도가 하늘에서 장엄한 궁전을 짓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메이슨리 제1도 의식에서 북동쪽 모퉁이에서 다루어지는 내용과 평행을 이룹니다.

    이러한 점들은 흥미롭지만, 템플러의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자들은 영지주의적 기독교와 현대 프리메이슨 간의 연결이 이 단계에서 확정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지주의 가르침과 유사한 프리메이슨의 핵심 개념, 즉 살아있는 동안 “부활”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 교회의 형성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가 필요했습니다.

    결론

    템플러가 그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킨 숨겨진 사본을 발견했다는 가정 하에 저자들은 영지주의 복음서로 알려진 초기 기독교 문서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들은 “영지” 개념이 교회의 “신앙” 의존성을 반박하지만 프리메이슨 사고와는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저자들은 초기 교회에 의해 정통으로 선택된 많은 교리가 종교적 신념뿐만 아니라 정치적 편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그분의 하늘 승천에 대한 믿음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의 핵심 요소였으며, 이 권위는 열두 사도들이 경험한 예수의 부활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문자적 부활을 “어리석은 자들의 신앙”이라고 언급한 영지주의 문서들은 죽은 스승의 육신이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영적 진리를 실제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비밀 가르침에 의해 지지되었습니다. 2세기의 신학자 이레니우스는 부활에 대한 영지주의적 견해가 기존 교회 권위에 미치는 위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저자들은 나그 함마디 사본을 연구하면서 부활에 대한 이 해석이 초기 기독교 교회 내에서 거대한 논쟁을 일으켰으며, 영지주의와 연관된 기독교 단체들이 예수와 관련된, 살아서의 영적 부활에 대한 비밀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자들은 이 영지주의자들이 정치적 이유로 이단으로 규탄받았고, 그들의 지식에 대한 갈망이 정통 교회 주교들의 권위를 위협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저자들이 영지주의 복음서를 계속 읽으면서 프리메이슨 의식과의 강력한 연결점을 발견했고, 이는 초기 기독교 교회를 더 깊이 탐구하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의 기원과 신약 성서 복음서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실제 사건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제5장: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였나?

    또 다른 성모탄생 이야기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한 교회의 역사적 해석이 얼마나 정확한지 의문을 제기하며 시작합니다. 그들은 나그 함마디 문서나 사해 두루마리 같은 문헌들이 신약성경에 대한 교회의 해석들을 아주 다르게 조명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자들은 기독교의 핵심 신화가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는 점에서 교회의 근본적인 난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한 남자가 누추한 곳에서 동정녀의 몸으로부터 탄생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문화와 종교 전통에서 오래되고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특히 로마제국에서 유행했던 미트라의 숭배 이야기와 상당히 유사한데, 교회의 교부들은 이를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패러디 하는 악마의 이야기라고 치부했다.
    저자들은 예수의 이야기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신화들을 가진, 예수 이전에 처녀에게서 태어난 신들의 목록을 제시합니다:

    • 디오니소스: 그리스 신으로, 말구유에서 처녀로부터 태어났으며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 퀴리누스: 초기 로마의 구원자로,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아티스: 기원전 약 200년경 프리기아에서 나마라는 이름의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인드라: 기원전 약 700년경 티베트에서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아도니스: 사랑, 다산, 전쟁의 바빌로니아 여신 이슈타르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크리슈나: 기원전 약 1200년경 힌두교에서 데바키라는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조로아스터: 기원전 15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처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미트라: 기원전 600년경 12월 25일에 말구유에서 동정녀로부터 태어났으며, 부활절에 부활을 축하받았습니다.

    책은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라는 이름이 나중에 붙여진 그리스어 이름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예수’라는 이름이 단순히 히브리어 이름 ‘예호슈아(Yehoshua)’의 그리스어 번역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름은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 용어로 ‘승리를 가져올 자’ 와 같습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영웅 여호수아(Joshua)와 연결됩니다. 이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나팔을 불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인물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이렇듯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예호수아를 그리스어로 단순히 옮겨놓은 것 뿐이지만, 문제는 ‘그리스도’ 라는 덧붙여진 이름이다.

    “그리스도(Christ)”라는 칭호는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Christos)’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저자들은 이 ‘메시아’ 개념이 유대교 전통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분석합니다.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단순히 정의롭고 왕권을 가진 정치적 지도자를 의미했으며, 후대 기독교 해석에서 부여된 초자연적인 구세주로서의 의미는 없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어/아람어 용어(메시아)가 그저 단순히 ‘유대인의 정의로운 왕이 될 자’ 라는 뜻인 데에 비해, ‘속죄를 통해 구원을 가져다주는 자’ 라는 의미를 가져온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왕들은 메시아들과 연관이 있다. 즉 그들에게 메시아라는 말은 왕이 될 자를 의미했던 것이다. 이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인 의미들로, 메시아와 그의 다가올 나라에 관한 유대인의 개념에는 그 어떠한 초자연적인 의미들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확신한다.

    노먼 코언은 유대적 의미의 메시아에 관해 간결하게 설명해준다
    ‘그는 기껏해야 야훼가 자신의 유대 백성을 통치하도록 명하고 인도하는, 위대한 군사 지도자나 현명하고 정의로운 통치자가 될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기독교의 핵심이기도 한 인간의 몸을 입은 초월자 구세주의 개념은 히브리어 성서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아 개념

    “메시아”라는 용어는 킹제임스 흠정역 구약성서(영국 국왕 제임스 1세의 명령에 의해 1607~ 11년에 번역된 성서)에는 단 두 번만 사용되며 신약성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시대까지 그것은 시리아나 바빌로니아, 특히 로마의 침략자들(유대인들이 ‘깃딤’ 이라 부르는)의 치하에서 벗어나 다시 주권을 차지할 날을 고대하던 유대인 사이에서 인기 있는 개념이었다.

    단어 ‘메시아’ 가 신약성서에는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번역가들이 초기 문서에서 히브리어 단어 ‘메시아’가 있던 자리에 그리스 단어 ‘크리스토스Christos’ 를 사용했을 경우에만 설명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며 Christos 에서 나온 ‘그리스도, 즉 크라이스트Christ’ 라는 호칭은 비록 그 단어 자체가 유일하게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지만, 다른 메시아나 그리스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동의어로 여겨지게 된다.

    기독교에서 발전된 신적 구원자의 개념은 히브리 경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유대교 전통에서 메시아는 초자연적인 인물이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으며, 신의 아들이라는 개념도 왕들이 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의미에서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유대 왕국을 회복할 인물이지, 세계의 신적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텍스트는 또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 전역에서 개종한 이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유대교 문헌을 자신들의 새로운 종교적 내러티브에 맞게 오해하고 재해석하며 심각한 신학적 변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그 의미를 재해석했고, 이로 인해 유대교의 전통적인 메시아 개념과는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저자들은 초기 기독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유대교 문헌을 왜곡하고, 그들이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른 해석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합니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스스로를 유대교인으로 여겼고 서기 1세기 말까지 사람들은 기독교를 하나의 유대교 종파로 보았다. 하지만 2세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 근방에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더이상 자신들이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문화적 약탈자들은 문맥이나 인정된 해석 따위엔 거의 상관없이, 원래의 주인들에 의해 정통 성서로 인정되지 않던 유대 문서들을 마음대로 인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는 70인역 성서(일반적으로 LXX 로 표시)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새로운 문장이나 책 전체를 끼워 넣었으며, 심지어는 그들 자신의 성서에서 이 부분들을 제외시켰다고 유대인들을 고발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한동안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새로운’ 구약성서에 만족한다. 하지만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학파 오리겐과 같은 학자들이 성서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회의를 갖게 되고, 결국 원래의 유대 성서가 유일하게 옳은 것 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기독교 교회 내의 새 성서는 모두 파괴되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지만, 이 논쟁은 곧 자신만의 성서를 가진 독립 종교가 되고자 하는 기독교적 욕망 속에 파묻혀버린다.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서구인들은 정치와 종교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만, 다른 나라들이나 다른 시대도 같은 식으로 사물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이란은 그 둘 사이의 어떠한 차이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2천 년 전 옛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에게 신과의 관계가 자신들의 국가적 어려움과 무관하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정치는 엄연히 종교적 문제였다. 국가의 안정이 전적으로 신의 손에 놓여 있었으니 말이다. 만일 자격이 있었다면 유대인들은 왕을 세우고 전쟁에서 적들을 쳐부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기에, 신은 그들을 적들의 손에 넘겼다. 그러나 믿음 깊은 유대인들이 경건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메시아가 와서 자신들의 통치자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간과해서는 안 될 굉장히 중요한 점이 놓여 있다. 구약성서의 어느 곳에도 세계를 구원할 구세주가 오리라는 예언은 없다.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이 땅의 왕이 도래할 것을 기대했으며, 아무리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되길 바랐을지라도 예수는 다윗 혈통의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 자신을 포함해서 그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라는 단어에 다른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논쟁을 넘어선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이 초기의 오해를 잘 알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비록 유대인들이 그 단어를 완전히 다른 식으로 사용했다 해도, ‘영적인’ 해석이 진정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기독교와 유대교의 ‘메시아’ 라는 용어 사용에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고 인정하는 한, 교회는 그리스도(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근거로 구약성서률 사용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뻔뻔스러운 사기일 뿐이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유대인들은 신이나 구세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첫 왕 다윗과 같은 자격 있는 정치적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주류 기독교가 가진 또 다른 문제는 예수가 여호와와 마리아의 신비한 관계를 통해 태어났다는 믿음이다.
    저자들은 예수의 출생이 고대 중동 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신과 인간 여성의 결합을 통한 출생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던 것에 대해, 이는 단순히 왕권을 주장하는 자는 누구나 가졌던 고대의 호칭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파라오 이전부터 모든 왕들이 자신의 통치권을 신이 내린 것으로 주장해 왔으니 말이다.

    두 명의 예수

    이 장에서 가장 논란이 될 주장 중 하나는 십자가형 당시 두 명의 “예수”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제안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라바는 유대인 폭도이자 살인자로 여겨지지만, 저자들은 이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바라바가 단순한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아들”을 의미하는 호칭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바라바, 우리의 구세주 대신 악독한 유대인들이 놓아주기로 선택한 극악무도한 살인자.’ 이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아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외침은, 신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비열한 천성에 대한 증거 하나로서, 그 후 2천 년 동안의 반유대주의 운동을 가져온다.

    하지만 ‘바라바Barabbas’ 가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호칭으로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 언어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아람어로 ‘Bar’ 는 ‘~의 아들son of~’ 을, ‘Abba’ 는 문자 그대로 ‘아버지father’ 를 의미하는데,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The Father , 즉 신God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로 인해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던 우리는 초기의 마태 필사본 27:16에서 이 남자의 전체 이름을 보고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Jesus Barabbas예수 바라바’.

    이 주장의 핵심은 마태복음 초기 사본에서 바라바를 “예수 바라바(Jesus Barabbas)”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Bar’는 ‘~의 아들’을, ‘Abba’는 ‘아버지’를 의미하며, ‘Barabbas’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저자들은 바라바가 단지 범죄자가 아닌,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인물, 즉 “예수,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선택을 맡겼을 때, 그들이 선택한 것이 단순한 범죄자와 구세주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 사이의 선택이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군중들이 석방을 요구한 것은 “예수, 하나님의 아들”로 알려진 바라바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군중들의 요청에 따라 십자가형을 면하게 된 자는 바로 ‘예수, 하나님의 아들’ 로 알려졌던 자로, 이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니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름의 첫 부분은 아주 나중에 기독교 신앙을 끼워 맞추기 위해 <마태복음>에서 삭제된다. 오늘날 이런 선택을 ‘사실대로 다 밝히지 않기’ 로 완곡하게 부를 수 있겠지만 이는 교회가 대답하지 않을, 아니 대답할 수 없는 까다로운 질문들을 피하기 위한 속임수 그 이상이다. 이는 복음서의 내용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야기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복음서들은 이 다른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 폭동에서 사람들을 죽인 유대 반역자로 고소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바라바는 범죄자가 아니라 유대 광신자로, 예수와 비슷한 죄목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사실들을 알아가면서 예수 재판을 둘러싼 전체 정황이 더 복잡해졌다. 같은 주장, 같은 이름에 더구나 같은 죄목을 가진 그들 중 누가 풀려났는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나? 실제로 많은 오래된 기독교 분파들은 다른 사람이 대신 죽었기에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교도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으나 다른 자가 대신 죽은 예언자로서 존경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징성은 주류 기독교의 절대적인 핵심이지만, 그 사건이 있었을 때에나 지금이나 많은 집단들이 그가 이런 식으로 죽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이 해석은 전통적인 십자가형 내러티브에 의문을 제기하며,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혼합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을 암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인물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루살렘의 주요 집단들

    1세기 유대 사회에는 세 개의 주요 종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그리고 에세네파입니다. 에세네파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쿰란에서 1947년 발견된 사해사본을 통해서야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쿰란의 에세네파를 사두개파 및 바리새파와 차별 짓는 가장 큰 차이점은 신분과 상관없이 성인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고,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종교적 가르침의 유일한 수호자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의義의 스승’으로 기록된 제사장이 세운 ‘새로운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의 신 사이의 동맹을 재확립했다고 믿었습니다. 에세네파는 613항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자신들을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바리새파와 마찬가지로 천사와 같은 낮은 등급의 신들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였다는 것을 확립했으며, 더 나아가 이들이 나사렛인들이자 예루살렘 교회였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쿰란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였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왜 신이 그 자신의 공동체의 지도자가 아니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루살렘 교회와 쿰란 공동체가 동일하다면, 왜 예수가 그들의 지도자가 아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집니다.

    사해사본과 예수의 연결

    사해 문서는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가 사용하는 특정 용어들 및 정확하게 같은 종말론 신앙을 지닌 한 종파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로버트 아이젠만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서기 1세기 40, 50년대경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가 예수의 형제였던 의인 야고보라고 주장합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감독으로 인정받은 인물로, 이는 두 집단이 사실상 동일한 집단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30년 동안 쿰란 공동체는 바로 예루살렘 교회였던 것이다.

    에세네파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유대인들이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규율을 넘어 진보적이고 창의적이었습니다.
    쿰란 공동체의 새로운 용어는 기원전 1세기에 유대교 신학에 도입되기 시작하여 타그믹 문학이 일반화되면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의 언어였던 아람어로 히브리어 성서를 번역해놓은 것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히브리어로 예배가 행해지는 동안 일반 예배자들을 위해 아람어로 동시통역되었다.
    통역자들은 자신들의 현 상황에 비추어 이해될 만한 단어와 문장을 사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주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다윗의 집의 나라’ 와 같은 쿰란의 용어들 모두가 동일한 정치적 목적을 말하고 있다. 조지 웨슬리 뷰캐넌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복음> 18:36)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었을 때에, 그는 그것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요한 복음>에서 모든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1)세상의 자들과 (2)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자들은 예수와 그를 믿었던 추종자들로, “세상”이 아닌 “교회”에 속했다. “세상” 은 모든 이교도들과 예수를 믿지 않던 자들이었다.’

    사해사본의 증거와 교회의 반응

    사해사본과 신약성서에 사용된 용어들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가톨릭 교회는 이를 무시하려 했습니다.
    사본을 해석했던 주교들, 드 보와 밀릭, 스케한, 퓌에크, 베누아를 제외한 사람들은 그 당시 사해 문서 중 많은 것을 쉽게 볼 수 없는 점을 불평했다. 그중 존 알레그로와 에드먼드 월슨은 공통되는 증거들이 확실해짐에도 불구하고 쿰란 공동체를 초기 기독교로부터 떼어내고자 하는 치밀한 정책을 느꼈다고 말한다.
    드 보 주교는 쿰란 공동체가 초기 기독교와 완전히 달랐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또한 쿰란 공동체의 가르침에 너무 가까웠던 세례요한은 기독교 인이라기보다는 그저 기독교의 선구자 정도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세례요한이 예수의 임무 수립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신약성서가 확실히 보여주고 있기에, 그러한 관련성을 무시하기는 힘들다. 드 보는 또한 두 집단 모두 세례를 행했고, 둘 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소유재산을 공유했으며, 12명의 지도자로 이루어진 평의원이 있었고, 둘 다 메시아 및 하나님 나라’ 의 임박한 임재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1956년 9월 16일 존 알레그로는 드 보 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당신은 더 이상 객관적으로 기독교를 다룰 수 없습니다 …. 최초의 유대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에 관해 당신은 태평스럽게 얘기해 나가고 있지만, 아무도 당신의 유일한 증거가 (그렇게 부를 수있다면) 신약성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드 보 주교와 그의 팀은 이 새로운 문서를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신앙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었으며, 의식, 무의식적으로 쿰란 공동체와 나사렛인, 즉 예루살렘 교회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던 것이다.
    이제 사기는 끝났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였던 남자는 서기 30, 40년대의 중요한 기간동안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였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 공동체의 크기는 그 당시 200명을 넘지 않는 정도로 소규모였고, 에세네파인들 전체는 4천명이 약간 넘을 정도였다. 비록 세습 제사장은 아닐지라도 수도자와 같은 거룩한 삶을 통해 곧 닥칠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 집단은 그랜드 마스터로부터 그 아래에 결혼한 남자, 또 그 아래에 여성, 특히 생리하는 여성에 이르는 극도로 위계적인 사회였다. 생리 중인 여성들은 어느 남자와도 접촉은 물론 눈조차 마주쳐서도 안 되었다. 번식은 삶의 필요악이었지만 육체에 탐닉했던 자들은 주요 공동체로 돌아가기 전에 철저한 정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곳의 일원들은 광범위한 외부 집단에서부터 내부의 핵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로 나뉘었으며, 상위의 단계에 오르려면 형제의 비밀을 외부세계로 누출했을 경우 끔찍한 벌을 받겠다는 비밀 엄수의 서약이 필요했다. 이는 메이슨과 상당히 비슷하게 들리지만 하나 다른 점은, 이 쿰란 수도자들은 그러한 위협을 상징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형벌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쿰란 수도자들에게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흰옷을 입고 청빈의 서약을 하며 끔찍한 형벌의 위협 아래에서 비밀 엄수를 맹세하고 비밀 지식을 가졌다고 주장하던 자들. 우리가 그린 예수가 포함되었을 급진적인 유대 집단의 그림 속에서, 이 집단이 주도한 유대 폭동으로 인해 결국에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파괴의 운명을 맞는다.

    쿰란 공동체와 예루살렘 교회가 사실상 동일한 집단이었다는 증거는 명백하며, 예수는 이 공동체의 지도자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공동체는 위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성전 기사단이 발견한 문서들은 초기 기독교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전 기사단과 프리메이슨의 연결

    당연히 우리는 성전 기사단이 헤롯왕 성전의 페허를 발굴했으며, 무엇을 발견했든 간에 발견물은 성전 건설의 초기 단계였던 서기 1세기 초경과 그것이 파괴된 서기 70년에 숨겨졌음에 틀림없다는 의견을 세웠다. 이는 7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숨겨졌다는 애기다. 구리판에 새겨졌기에 동판 두루마리로 불리는 쿰란 사본은 공동체가 서기 70년 직전에 신전 아래에 어떻게 보물과 문서들을 숨졌는지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전 기사단이 발견한 것이 누구의 문서인지 추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생각대로 쿰란 공동체와 예루살렘 교회가 같은 것이었다면, 성전 기사단은 확실히 가장 순수한 ‘기독교’ 기록을 소유한 셈이다. 공관복음서보다도 휠씬 더 중요한 문서 말이다!

    쿰란 공동체와 성전 기사단, 그리고 프리메이슨 모두가 솔로몬 성전의 영적, 물리적 재건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절대로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 않으며, 아울러 프리메이슨이 관련된 이상 사기성 조합도 아니다. 왜냐하면 영국 그랜드 로지와 영적 성전 건설에 관한 그곳의 가르침은 사해사본의 발견보다 200년도 넘게 앞서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기독교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영지주의와 신약성서, 프리메이슨 모두 공통적으로 ‘모퉁잇돌’ 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쿰란 문서에서도 같은 언급이 있었다. 아이젠만과 바이즈는 사해 문서와 기독교 간의 관련들 중 이 점에 주목한다.

    ‘신약성서에 익숙한 독자들은 여기에서의 “공동체”와 “성전”이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암시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에서 예수가 “성전”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공동체 훈령 8:5-6과 9:6에서도 비슷하게, 영성이 부여된 “성전” 이미지를 사용하여 쿰란 공동체 평의회를 “아론의 지성소와 이스라엘의 성전”으로 그리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것은 “속죄”와 “향기”, “모퉁잇돌”, “초석”에 대한 유사한 암시들과 함께 쿰란에 만연한 이미지였다.

    예수의 가족

    교회가 논의를 꺼려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예수가 형제들과 아마 자매들도 있었다는 증거다. 예수가 형제자매가 있었다는 증거는 신약성서뿐만 아니라 1, 2세기의 여러 문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물론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경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다른 형제자매들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다행히 예수가 맏이였다는 증거가 있으니, 그가 동정녀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은 바로 탈락되지 않는다.
    하여간 예수의 형제들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었고, 이에 대한 세 가지 주요 이론이 제시되었습니다. 헬비디우스는 예수의 형제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주장했으며, 에피파니우스는 그들이 요셉의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롬은 ‘형제’라는 단어가 사실 ‘사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성서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의 듀아이 성서는 다음 글에서 편파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헬비디우스와 다른 이교도들은 불경스럽게도 신성한 동정녀 마리아가 그리스도 외의 자녀를 낳았다고 추측한다.’

    이 의견은 <마태복음> 13:55-56과 모순된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모친은 마리아라 하지 않느냐? 또,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니냐?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들과 함께 있지 않느냐?’

    이에 대한 듀아이 성서 편집자들의 대답은, 비판적인 독자에게는 별로 다가오지 않겠지만 창의적이긴 하다.
    ‘그들은 우리 신성한 마리아의 자매인 마리아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므로 성서의 일반적인 방식에 따라 그들은 구세주의 가까운 친척, 형제로 불렸던 것이다.’

    만일 이 이상한 설명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예수의 외조부에게 2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둘의 이름이 모두 마리아였다는 말인가? 하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예수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수의 막내 남동생 야고보(Ya’acov: 영어로 Jacob, 그리스어 성서에서는 James)는예수보다 거의 30년은 더 살았다. 예수의 막내 동생 야고보는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지킨 결과, 그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게 된다.

    새로운 종교의 탄생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붕괴된 후,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기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예호수아라는 유대 영웅의 모습은 로마의 이교 신화들과 겹쳐지면서 사라져갔고, 그 결과 민족의 구세주 왕이 되고자 했던 남자의 이야기는 로마의 오래된 이교도전설과 결합했다. 일례로 로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 전설은 2명의 새로운 하급 신인 위대한 성자 베드로와 바울로 번안된다. 또, 태양신인 솔의 생일이 12월 25일이었는데, 이날이 예수의 생일로도 적합하다고 여겨져 위대한 신들은 같은 축일에 기념될 수 있었다. 안식일은 토요일에서 태양신의 날인 일요일Sunday로 옮겨졌고, 태양의 상징은 후광의 형태로 신과 성자의 머리 뒤에 놓인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종교는 시민들에게 친숙하고 위안이 되었다. 이생에서는 별 볼일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음 세상에서는 더 나을 테니 말이다. 역사 속의 대부분의 인류들과 마찬가지로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쾌락을 선호했던 그들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야 자신들의(지금은 하나가 된) 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일이 잘되어가면 찬양했다. 기독교는 사상이라기 보다는 승배 의식이 되었고 종교는 정치적 목적의 뒷전으로 물러났다.

    로마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독교는 교회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사후에 더 나은 삶을 얻으려고 하는 순진한 백성들에 기반을 둔, 견줄 나위 없는 힘을 갖는 수단을 로마에 주었다. 17세기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였던 토머스 홉스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표현한다.
    ‘교황제도는 그 무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소멸한 로마제국의 유령에 다름 아니다.’

    이단의 진실

    초기 로마 교회는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파괴하는 임무에 착수한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교회가 원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뜻에 위반하는 모든 것의 제거였다. 그 결과 최근까지 신약에 주어진 빈약한 정보 외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세계 최고 종교의 기초가 되는 인물의 자취가 어떻게 그토록 희미한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반대세력들이 주장하는 부정적인 면들을 통해 역사적 인물의 존재를 밝혀내기도 하지만, 예수는(우리가 이 책 나중에 볼 슬라브어 요세푸스로 알려진 최근 발견 문서를 제외하고는) 1세기의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글 등의 문헌에도 확실히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에 관한 자료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이유는 검열의 칼날 때문이지만, 다행히도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숨겨졌던 슬라브어 요세푸스가 예수에 관해 보여줄 것이니 말이다.

    로마화된 교회는 구세주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면 모두 파괴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든 증거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는데, 영지주의 복음서와 사해사본이 그것들이다. 나아가 공식 교회를 설립한 교부들의 글은 부지불식간에 자신들이 파괴하고자 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뿐인가? 별로 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검열에서 살아남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의 글들은 실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2세기의 지도적인 기독교 사상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펜 끝에서 나온다. 외양상 그는 다소 영지주의적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헌은 거의 파괴되지 않았다. 다음은 그가 테오도르라는 이름의 알려지지 않은 남자에게 쓴 편지다.

    ‘카포크라테스파의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묵살한 것은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예언에 언급된 계명의 좁은 길로부터 세속적이며 육신에 속한 죄의 한없는 심연으로 빗나간 “방황하는 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사탄의 비밀” 을 알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자신을 거짓된 “암흑의 지하세계” 로 버리고 있으며, 스스로 자유롭다고 떠벌리면서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한 자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힘을 합쳐 배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약간의 진실된 말을 한다해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동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모든 참된 <것들>이 진리는 아니며, 인간의 눈에 진실해 보일 <뿐>인 그 진리가 신앙에 따른 진실보다 우선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신성한 영감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 중 일부는 완전히 곡해된 것이며, 다른 것들은 비록 일부 진실된 <부분>이 있을지라도 진실로 여겨지지 않는다. 날조가 끼어든 <것들>은 왜곡된 것이기에 소금이 그 맛을 잃기 때문이다. 마가에 <관해> 말하자면, 그는 로마에서 베드로의 집에 묵었을 때에 주님이 하신 일에 관해 기록했지만, 전부는 아니었고 비밀스런 <행동들>을 암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신도들의 신앙을 키워주기에 가장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뽑아 쓴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순교하고, 마가는 자신과 베드로의 기록을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와 이들 기록을 토대로 <지식gnosis >으로 향한 과정에 도움이 될 만 한 것이면 무엇이나 책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그는 좀 더 영적인 복음서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으며 주님의 깊은 가르침을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기록된 이야기들에 다른 것들을 더했을 뿐 아니라, 비법 전수자들이 해석을 통해 제7의 봉인으로 감추어진 진리의 가장 깊은 성역에 이를 수 있는 어떤 말들을 도입했다. 이와 같이 마가는 사전에 신중하게 자료를 준비 배열했으며, 죽을 때에 그의 책을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 남기는데, 그것은 지금까지도 조심스럽게 보존되어 오직 허락된 자들만이 그 위대한 비밀들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더러운 마귀들은 언제나 인간을 멸망시킬 궁리를 하기에, 마귀에게 조종당해 거짓 기교를 부리는 카포크라테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어떤 장로를 포섭하여 비밀 복음서의 복사본을 입수하고는 불경스럽고 세속적인 교리에 따라 해석했다. 뿐만 아니라 그 흠 없고 거룩한 글을 완전히 파렴치한 거짓과 섞어 더럽혔다. 이를 통해 카포크라테스파의 가르침을 담은 것 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했듯 우리는 그들에게 져서는 안 되며, 그들이 거짓 주장을 할 때에 우리는 비밀의 복음서가 마가가 쓴 것이라고 인정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맹세코 그것을 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된 <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이유>로. 솔로몬의 지혜서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고 말하며 진리의 빛은 영적으로 눈먼 자들로부터 숨겨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될 것임이라.”, 그리고 “미련한 자들로 어둠 가운데에서 깨어나도록 하라.”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빛의 자녀들” 로서, “높은 곳에 계신” 주님의 영의 “새벽 빛”에 비춤을 받고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기”에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마가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위조 여부를 따지면서 그대가 물었던 질문들에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 후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와 그 후, “그가 죽은 뒤 셋째 날에 살아날” 때 까지 <마가의 비밀 복음>은 다음의 <구체적인>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베다니로 같 새, 죽음으로 오라비를 잃은 한 여인이 다가와 예수 앞에 엎드려 “다윗의 아들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하더라. 이에 제자들이 나무라자 노한 예수가 오라비의 무덤이 있는 동산으로 그녀와 함께 가니, 곧 큰 울음소리가 무덤에서 들리더라. 예수가 가까이 가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굴려 치우고 곧 그 젊은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가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니, 올려다보던 그 젊은이는 그를 사랑하게 되어 동행하게 해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하더라. 무덤에서 나온 그들은 그 젊은이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부자였기 때문이니라. 엿새가 지난 뒤 예수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쳤고, 그날 저녁 젊은이는 <그의> 벌거벗은 <몸>에 아마포 옷을 걸치고 예수께 나와 그날 밤을 예수와 함께 보냈는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그에게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라. 예수는 그곳에서 다시 일어나 요단강 건너편으로 돌아갔도다.’
    이 <말씀> 후에는,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그에게 와서”라는 문장이 나오고, “벌거벗은 <남자>와 함께 있는 벌거벗은 <남자>”를 제외한 모든 부분과 그대가 썼던 다른 것들은 나오지 않았다.
    또, “그리고 그가 여리고로 가니,”라는 <말씀> 후에 <비밀 복음>에는 오직 “그리고 예수가 사랑했던 젊은이의 여동생과 그의 모친, 살로메가 거기 있는데 예수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라는 말만이 나온다. 하지만 그대가 썼던 많은 다른 <것들은> 그래 보이기도 하며 거짓되기도 하다. 이제 진실된 설명과 진정한 철학과 일치하는 것은-….여기서 편지는 중간에 끊긴다.

    비밀 복음서의 내용

    클레멘트의 편지에서, 마가의 비밀 복음서가 등장한다. 이 복음서는 마가가 예수의 깊은 가르침과 비밀을 담아 작성했다고 주장된다. 클레멘트는 이 복음서가 교회에서 비밀스럽게 보관되고 있으며, 비밀의 복음서는 허락된 자들만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마가 비밀 복음에 관해, 그리고 더 중요하게 예수 그 자신이 행한 비밀 내부 의식에 관해 보여주는 이 자료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게 사실일까? 클레멘트가 틀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편지가 위조된 것일까? 하지만 왜? 그렇게 오래전에 누군가 무슨 이유로 그런 것을 했단 말인가? 편지의 골자로 돌아가, 우리는 아마포 옷만 걸친 벌거벗은 젊은이’ 라는 언급과 <마가복음> 14:51-52에 설명된,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체포될 당시의 설명되지 않은 사건 간에 강한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편지에 따르면, 마가의 비밀 복음서에는 예수가 무덤에서 젊은이를 부활시키고 그와 함께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카포크라테스파가 왜곡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려 했다고 클레멘트는 주장한다.

    카포크라테스파는 죄가 구원의 수단이라고 믿었던 특히 기분 나쁜 초기 기독교의 분파였고, 2명의 벌거벗은 청년에 관한 함축된 의미는 자신들의 기괴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사건을 오도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클레멘트는 “소수만을 위한 신앙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지혜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으며, 비유로 표현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성서의 기적들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숨겨진 의미를 가진 비밀스러운 전통임을 시사한다. 물론 후기 기독교 검열을 통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지식이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들은 그들이 평의회에서 논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귀로 들은 것은 지붕 위에서 크게 외치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진정한 지식의 비밀 전통들을 받고 그것들을 확실히 설명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귀로 들은 대로 필요한 자들에게 전해야 한다. 하지만 구분 없이 모두와 나누지 말고 비유로 말해야 한다.’

    이것은 비밀스런 전통이 있었으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서 속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에 숨겨진 의미가 있을 수 있었을까?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거나,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는 등의 기적들 배후에 비밀스러운 메시지가 숨겨져 있을까?

    메이슨과의 연결고리

    마가복음 14:51-52의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른 청년’의 이야기는 마가의 비밀 복음서와 관련이 깊으며, 이는 프리메이슨의 의식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입문자는 흰 아마포만을 걸친다. 또한 성전 기사단의 외투도 원래는 소박한 흰 아마포였으며, 이는 메이슨과의 연결을 암시한다.

    또 다른 2세기 기독교도 히폴리투스가 지은 책 <이단들에 대한 반박> 을 읽다 우리는 그가 나아센인이라고 부른 이단 종파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을 찾았다. 그들은 마리암네가 낳은 주의 형제 야고보로부터 전해 내려 온 신앙을 가지고 있던 자들로, 남녀의 성관계를 사악하고 더러운 행위로 여긴 반면, 생명수로 씻는 것은 중요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히폴리투스는 계속한다.

    ‘그들은 이집트인들이 모든 인류 중 프리기아인들 다음으로 오래되었으며, 인류에게 <사물>의 형식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신들의 의식과 주신제를 찬양했던 최초의 자들로서, 신성하고 존엄하며, 비법을 전수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이시스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곱 겹의 드레스와 검은 겉옷을 걸친 이시스가 찾아 헤매다 되찾은 것, 즉 오시리스의 외음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시리스가 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천상의 직물로 된 일곱 외투로 둘러싸인 존재가…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성서에 선포된다고 <나아센인들>은 말한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저자는 이 넘어짐이 별들을 운행시키는 그분에 의해 움직여지는 별들의 변화라고 말한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는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나아센Naassene이라는 단어는 ‘Nasorean(나조레안)’의 다른 형식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했던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이 택한 이름. 여자와의 성적 접촉에 대한 혐오와 정화의 주요 역할에 대한 묘사 또한 사해사본을 만든 쿰란의 에세네파 공동체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숫자 7에의 집착은 흥미롭게도 클레멘트의 편지에서 ‘제7의 봉인으로 감추어진 진리의 가장 깊은 성역’에 관한 언급과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또한 전체적으로 굉장히 메이슨적인 느낌을 받았다. 비록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결국 프리메이슨의 로열 아치 등급 의식을 보았을 때에 분명해진다.



    *히람의 열쇠*의 5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정체성에 대해 탐구하며, 그가 인간, 신, 신화, 또는 프리메이슨이었는지에 대한 논의를 펼칩니다. 이 장은 초기 기독교 분파들, 특히 나아센파(Naassenes)와 그들의 프리메이슨, 고대 이집트 의식, 에세네파(Essenes)와의 연결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흥미로운 논의를 제공합니다.

    저자들은 2세기 기독교 작가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모든 이단의 반박(Refutation of All Heresies)*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검토하면서 시작합니다. 이 텍스트는 나아센파라는 분파를 언급하며, 그들은 마리암네가 낳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로부터 전해진 가르침을 따랐다고 주장하고, 남녀의 성관계를 사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며 물을 통한 정화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히폴리투스는 다음과 같이 이어서 설명합니다:

    > “그들은 이집트인들이 프리지아인들 이후 신성한 비밀을 가진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며, 이집트인들은 이시스(Isis)의 신비를 보호했으며, 이는 비밀스럽고 입문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신비는 이시스에 의해 잃어버렸다가 발견된 오시리스의 남근에 불과했다. 나아센파는 이 상징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오시리스가 물을 의미하며, 일곱 겹의 옷을 입은 인물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성경 말씀에 나타난 신성한 존재임을 시사했습니다.”

    나아센파에 대한 이 언급은 저자들로 하여금 이들이 사해문서를 작성한 쿰란의 에세네파와 연결된 것으로 보게 합니다. 또한 나아센파의 숫자 7에 대한 집착은 클레멘트의 편지에 언급된 “일곱 번째 봉인”과 공명하며, 후에 프리메이슨의 의식과도 연결됩니다. 예수가 이 분파의 창시자가 아니라 일원이었다는 생각은 전통적인 기독교 내러티브에 도전합니다.

    예수와 템플 기사단의 연결

    이 장에서는 또한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원래 나소레안(Nasoreans) 또는 나사렛인(Nazarenes)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이 용어가 단순히 지리적 출신을 의미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탐구합니다.
    ‘나사렛Nazareth 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Nazarene 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리라.’

    마태복음 2:23에서 예수가 나사렛에 살았다고 하여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언급하지만, 저자들은 예수 시대에 나사렛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며 신약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들은 “나사렛의 예수”가 원래는 “나소레안 예수”였을 수 있으며, 이는 특정 종교 집단의 일원을 의미하는 칭호였다고 주장합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의 초기 활동 영역은 갈릴리 바닷가로, <마태복음> 4:13에 설명된 가버나움으로의 이동은 단지 역사 짜 맞추기의 일환일 뿐이다.

    나조레안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이야기 속에서 굉장히 중요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중, 중요한 단서 하나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나온다. 스쿠버 다이버인 크리스는 시나이 반도 방문 중에, 홍해의 산호초 위로 잠수할 기회를 가진다. 배에 타자마자 친절하고 박식한 아랍인 가이드 에합에게 그 지역의 이름을 물었더니. ‘라스 나스라니’ 라는 곳이라고 한다. 그 말의 의미를 묻자 ‘라스’ 는 간단히 ‘머리’ 또는 ‘꼭짓점’ 으로 해석되고, ‘나스라니’ 는 작은 물고기 떼를 가리킨다고 했다. 어떤 종류의 물고기냐는 질문에, “그냥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평범한 작은 물고기”란다.
    ‘며칠 후,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기독교인들을 “나스라니nasrani”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확인해본 결과, 이것이 예수라 불리던 중요한 선지자의 추종자들을 부르는 아랍 표준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즉시 마음속에 많은 생각을 만들어냈다. 쉽게 말해, 초기 기독교인들이 작은 물고기들 이었다고?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물고기를 낚는 어부’의 이미지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고대의 사제-물고기 관계에 기초한다는 것이 좀 더 그럴듯하다. 에세네파의 단원들은 모두 사제처럼 헌신하고 율법에 순종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목욕을 했는데, 이 또한 그 용어를 사용할 좋은 이유가 되는 셈이다. 이 가설은 나조레안파의 단원들이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지들을 순회하면서. 2개의 호弧를 사용하여 물고기 표시를 한 사실과 들어맞는다. 그런데 그 집단의 상징이 십자가가 아니라 물고기였다니…. 흥미롭다. 예수의 십자가형은 그 당시에는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추가 연구에 따르면 나소레안은 에세네파와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보다 먼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예수가 교회의 창시자가 아니라 이 분파의 중요한 인물이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조레안 분파의 고위 인물들로서 추종자들을 모집했고, 따라서 생업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기보다는 모집 활동의 의미에서 ‘어부’ 로 알려지게 되었을 수 있다. 물고기가 없던 사해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에 일리 있는 생각이다. 이에 따라, 타당성을 주기 위해 후대의 신약성서 저자들이 이 ‘어부들’ 의 기원을 물고기가 풍부한 갈릴리 바다로 바꾸었던 것이라고 볼수 있다.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낚는 자”로 알려졌다는 이론과도 일치하며, 이는 에세네파의 의식, 특히 그들이 자주 행한 정화 목욕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연구가 진행되며, 형용사 ‘나조라이오스nazoraios’ 가 후에 기독교도로 알려지게 된 분파를 칭하는 초창기의 단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피파니우스는 리즈바르스키와 같은 수많은 학자들이 주장한 바대로, 예수라는 인물(즉 교회)이 나온 분파의 원래 명칭 나자라이오이Nasaraioi라는 원시기독교 집단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는 다시 한 번 예수가 설립자라기보다는그저 한 명의 일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셈이다.
    2가지 점이 분명해졌다. 즉 예수는 나사렛 마을 출신이 아니며, 대신 스스로를 ‘물고기’ 로 여겼던 나조레안Nasorean 분파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이 장에서는 또한 이라크 남부에 여전히 존재하는 영지주의 분파인 만다야파(Mandaeans)를 소개하며, 이들은 자신들이 나소레안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을 창시자로 여기고 예수가 그에게 맡겨진 비밀 가르침을 배신했다고 믿으며, 이는 프리메이슨 의식과도 흥미롭게 일치합니다.

    만다야파와 프리메이슨의 가능성 있는 연결

    만다야파는 자신들을 “나초라제(Natzoraje)”라고 부르며, 이는 “나소레안”과 유사한 용어입니다. 그들은 “쿠슈타(Kushta)”라고 알려진 비밀 악수를 포함한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의식을 행하며, 이는 “의로움”을 의미합니다. 이 눈에 띄는 유사성은 저자들로 하여금 프리메이슨 의식이 이러한 고대 종교적 관행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의 가설을 입증할 정보를 찾으려 애쓰던 우리는 나조레안 분파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만데안 분파의 일부로서 남부 이라크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만데안 분파의 일원들은 자신들 종교의 기원을 예수가 아닌 야히아 유하나Yahia Yuhana, 즉 기독교인들에게 세례요한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의 책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비슷한 단어 ‘natzoraje’ 로 칭하며, 예수가 나조레안이었지만 그에게 위임된 비밀 교리들을 배신한 반역자이자 이단이었다고 믿는다. 그는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었으며, 누구에게 이 비밀들을 폭로했을까?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만데안파에 관해 잘 알지 못했던 우리는, 다음 글에 주목했다.
    ‘이라크에 거주하는 작지만 열심인 공동체 만데안파는 영지주의의 고대 형식을 따라, 입문식과 황홀경 및 프리메이슨의 것들과 비슷하다고 일컬어진 일부 의식들을 행한다.’ 아콘 대롤Arkon Daraul: <비밀 단체들 Secret Societies>

    그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직접 이은 한 집단, 또한 그들에 관한 최초의 설명 중 하나가 그들의 의식을 프리메이슨단의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집단 말이다. 예수가 배반했다고 여겨지는 비밀이 메이슨 의식 비밀의 일종이지는 않을까? 이 놀리운 생각은, 매우 중요한 어떤 사실을 밝혀낼 단서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만데안파가 자신들의 사제를 ‘나조레안’ 이라 칭하는 사실에서 확인된 가능성 말이다! 우리는 그 이름이 ‘비밀 지식’을 의미하는 ‘만다Manda’ 라는 단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만데안파는 ‘쿠쉬타Kushta’ 라고 불리는 악수를 하는데, 이는 ‘의로움’ 이나 옳은 일을 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식의 입문자들에게 주어지는 악수법이다. 참으로 메이슨적이지 않은가?

    메이슨적 뉘앙스는 계속된다. 만데안파는 입문자가 의식儀式적으로 죽었다고 여겨질 때 묵상을 하는데, 이는 프리메이슨단의 비밀이 마스터 메이슨 지원자가 의식儀式적인 무덤으로부터 일으켜 세워질 때에 그의 귀에 속삭여지는 것과 똑같다. 이것은 이후 우리 연구에서 과거와 현대 프리메이슨 간의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해준다.

    만데안파의 별

    예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종교적 화석과 의식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시작하던 크리스는, 눈앞에 역사를 펼쳐줄 놀라운 단서들을 발견한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에세네파가 선한 영혼은 바다 저 너머에 산다는 믿음을 지녔다고 보았는데, 그곳은 폭풍우도 눈보라도, 뜨거운 열도 없이, 바다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서풍의 부드러운 숨결로 새로워지는 곳이라 생각되었다. 이 바다 건너 서쪽에 있는(때로는 북쪽) 목가적인 땅은 유대에서 그리스, 켈트에 이르는 많은 문화들에 공통되는 믿음이다. 하지만 만데안파의 믿음에 따르면, 너무나도 순수한 이 먼 땅의 거주자들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그 장소는 ‘메리카Merica’ 라는 이름의 별로 표시된다고 한다.
    바다 너머의 땅, 메리카Merica라는 별로 표시되는 완벽한 장소…. 아메리카A-merica? 우리는 나조레안들에게 특별히 중요했던 샛별morning star과 서쪽의 별인 개밥바라기evening star가 똑같은 천체, 즉 금성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미합중국은 메이슨주의에 입각한 헌법을 통해 프리메이슨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이미 알고 있듯 진급한 마스터 메이슨은 샛별을 향해 바라보아야만 한다. 상징으로서의 별은 미국에 언제나 중요한 존재였다. 우리의 생각은 즉시 메이슨 의식과 로지 모임을 마칠 때에 미쳤다. 워십풀 마스터가 시니어, 주니어 워든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시니어 워든 형제여, 그대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서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워십풀 마스터.’
    ‘주니어 워든 형제여, 왜 동쪽을 떠나 서쪽으로 가는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워십풀 마스터.’
    ‘시니어 워든 형제여,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
    ‘마스터 메이슨의 진정한 비밀입니다. 위십풀 마스터.’

    이 장은 별과 별자리의 상징, 특히 만다야파가 바다 너머의 순수한 땅과 연관된 것으로 여기는 “메리카(Merica)” 별에 대해 탐구하며, 이는 이 고대 믿음과 아메리카 명칭 사이의 연결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로슬린 예배당의 미스터리

    저자들은 그 후 스코틀랜드에 있는 로슬린 예배당으로 초점을 옮깁니다. 이곳은 템플 기사단과 프리메이슨과 깊은 관련이 있는 장소로, 15세기에 윌리엄 싱클레어 경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이 예배당에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 이전에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로에와 옥수수 같은 신세계 식물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세계에 대한 지식이 콜럼버스 이전의 경로를 통해 유럽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이는 템플 기사단에 의해 전해졌을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찾던 식물들을 발견했다. 남쪽 벽에난 창문 위로 궁형을 이루고 있는 옥수수와, 같은 벽에 연결된 상인방을 가로 질러 있는 알로에 선인장이 그것들이있다. 다른 곳에는 그밖에 알만한 식물들이 있었고, 어디에나 다산을 의미하는 켈트족 인물인 ‘그린맨’ 의 표시가 있었다. 그들은 세어보니 100명이 넘었는데, 식물들 속에는 더 많아 보였다.

    로슬린 성당은 놀랍고도 신비한 장소다. 기독교를 고대 켈트족 민간전승 및 성전 기사단/프리메이슨과 잇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장은 나소레안, 에세네파, 만다야파, 프리메이슨 사이의 수많은 연결 고리를 강조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이러한 연결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 비밀의 첫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유대 종교의 핵심 요소들이 처음 어디에서 등장했는지 말이다.